칼럼

아들의 존재를 숨겨주는 대가가 5억?

[조혜정의 사랑과 전쟁] 5억 주면 아들 존재 비밀로 해준다는데…

조혜정 변호사 2016.05.31 10:10

Q. 환갑을 눈 앞에 둔 남자입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1년 전 퇴직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 옛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제가 7년 전쯤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1년 정도 만나다가 헤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저와 헤어진 후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내와 헤어질 생각은 없었기에 그 여자가 결혼해 안정을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축복해 줬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여자가 전화를 해서 결혼해 낳은 아들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저의 아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하고 지금은 혼자 아들을 키운다면서 제가 5억원을 주면 아들의 존재를 밝히지 않고 끝까지 비밀로 해주겠다고 합니다. 퇴직해서 집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인데 숨겨놓은 아들까지 있다고 하면 이혼당할지도 몰라 정말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들의 존재를 숨길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주고 싶긴 하네요.

그러나 5억원을 받고 난 후 돈을 더 요구하거나 애초 약속과는 달리 아들의 존재를 밝힐까봐 고민입니다. 5억원을 받고 아이 존재를 밝히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쓰면 이 합의서가 효력이 있을까요? 전화를 받은 후부터 매순간 가시방석에 앉은 듯 괴롭습니다. 

A. 아이고, 이를 어쩌나요. 얘기를 듣는 제 마음도 정말 괴롭습니다. 평온한 노후가 위태로운 선생님, 남편의 배신으로 고통받을 사모님, 아빠의 존재를 모르고 자랄 아이, 혼자 양육을 책임져야 할 아이엄마, 어느 누구의 고통도 가볍지 않네요. 꼬여버린 이 인연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할지 답답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 법률적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사안의 아들과 같은 위치의 혼외자는 친부가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는 '인지(認知)'신고를 해줘야 정식 혼인관계에서 낳은 자녀와 같은 법적 지위를 갖게 됩니다. 만약 아버지가 인지를 거부하면 자녀와 자녀의 법정대리인(아이엄마)은 친부에 대해 인지청구소송을 해서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인지절차를 거쳐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되면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해서 부양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와 상속을 받을 권리가 생깁니다.

혼외자의 인지와 관련된 사건에서 보통은 아이엄마가 친부의 인지신고를 요청하다가 친부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 때 소송을 합니다.  소송은 인지청구와 함께 양육비 청구를 하는데 양육비 청구에는 아이 출생 후 소송제기 시점까지의 과거양육비를 같이 청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혹은 부친 생전에는 조용히 있다가 부친 사망으로 상속이 개시되면 그 때 인지청구를 하면서 상속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체로 '돈을 주면 아이의 존재를 비밀로 해주겠다'는 아이엄마 측의 제안이 한 번쯤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돈을 받고 인지청구를 포기한다'는 합의서의 법적인 효력에 대한 판례도 있습니다. 그 판례는 혼외자 측이 거액의 돈을 받고 인지청구를 포기하겠다고 합의서를 썼는데 부친이 사망하자 약속을 어기고 인지와 상속재산분할을 요구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소송을 당한 측에서 혼외자 측의 요구가 합의 내용과 달라서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합의내용이 '처분할 수 없는 신분관계의 처분'에 대한 것이라서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 근거입니다. 쉽게 말해 핏줄을 속인다는 합의는 무효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판례를 보면 선생님이 5억원을 아이엄마에게 주고 합의서를 쓴들 그 합의서는 효력이 인정되지 않을 겁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보면 혼외자의 존재가 끝까지 비밀로 남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행히 선생님 생전에 비밀을 지켜준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사망 후에는 인지청구와 함께 상속권을 주장한다고 보셔야 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숨겨둔 아들이 처음 등장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정을 고려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먼저 유전자검사를 통해 친자여부를 확인하고 친자가 맞다면 아이엄마에게 적정한 양육비를 지급하면서 가족들에게는 아들의 존재를 밝히고, 용서와 이해를 구하시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것을 숨기려다 가족들과 아이에게 더 큰 상처와 충격을 주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조혜정 변호사는 1967년에 태어나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차별시정담당 공익위원으로 활동하고, 언론에 칼럼 기고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한변협 인증 가사·이혼 전문변호사로 16년째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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