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도 아니고 남도 아닌···'사실혼'의 비애

[Law&Life-사실혼 ①] 사실혼 인정 여부, 판사 개인 판단 몫…배우자 사망 후 재산 문제 논란

김종훈 기자 2017.08.11 05:01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A씨는 2007년 일본 여행 길에 만난 B씨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듬해부터 7년 동안 두 사람은 서울에 오피스텔을 두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부부처럼 지냈다. A씨는 자신을 남편으로, B씨를 부인으로 불렀다. A씨는 B씨의 딸 대학 졸업식, 결혼식 등 여러 가족 행사에도 함께 참석했다.

문제는 A씨가 천주교 신부였다는 점이었다. 교인으로부터 "B씨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A씨는 결별을 선언했다. B씨가 "은퇴하고 혼인신고 하고 살자더니 대단하다"고 비난하자 A씨는 "과거 인정, 현재 고백"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B씨는 A씨가 사실혼 관계를 파탄냈다며 2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재판에서 쟁점은 A씨에게 결혼 의사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은 장차 혼인을 하겠다는 진실한 합의 하에 교제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A씨에게 관계를 파탄낸 책임이 있다고 보고 B씨에게 1000만원의 위자료를 주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2심은 A씨가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A씨가 보낸 문자메시지만으로 법률상 혼인 약속까지 했다고 추론하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인정받지 못하는 비극적 사랑
남녀는 언제부터 부부가 될까? 통계청의 '2016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3만8600명 가운데 '결혼 없이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에 달했다. 우리 국민의 2명 중 1명은 혼인 절차없이도 부부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현실이 이렇지만 법은 '혼인신고'를 한 경우에만 부부로 인정한다.

문제는 A씨와 B씨의 경우처럼 관계가 파탄나 법정다툼으로 이어졌을 경우다. 사실혼 관계가 인정되는지 여부에 따라 위자료, 재산분할, 연금수급 문제가 갈리기 때문에 갈등이 첨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법은 사실혼 여부를 가르는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법원은 '당사자 사이의 결혼의사와 결혼생활의 실체'라는 판례상의 기준으로 사실혼 여부를 판단한다. 구체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는지 여부와 호칭, 경제생활, 주변 가족과 지인들의 인정 여부 등이 판단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는 판사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가능성이 큰 요소들이다. 이 때문에 A, B씨의 경우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법원에서 판단이 엇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가 다수라는 점도 문제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결혼생활을 알리지 못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이 사실상 부부처럼 살았어도 가족 등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사실혼으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한 가정법원 판사는 "최근 간병인과 환자 관계였다가 사실혼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자녀가 '간호하는 줄만 알았지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사실혼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새 배우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자녀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차마 사실대로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아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대표적인 게 사실혼 배우자의 사망 후 생기는 재산분배 문제다. 우리 법은 혼인신고를 한 법률혼 부부에게만 상속권을 인정한다. 사실혼 당사자가 사망한 뒤라면 재산을 요구할 방법은 거의 없다. '생계를 함께 했거나 특별한 연고가 있는 자가 청구하면 상속재산을 받을 수 있다'고 한 민법 제1057조의2에 따라 '특별연고자'라고 주장하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러나 이것도 상속권자 중 아무도 상속을 주장하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실제로 학부모와 교직원 관계로 만난 한 남녀가 남몰래 부부생활을 하다 한쪽 배우자가 사망하면서 재산 문제에 부딪힌 경우가 있었다. 법률상 상속권이 없었던 사실혼 배우자는 제 손으로 키운 상대방 배우자의 자식들에게 상속재산을 넘기고 집을 나와야만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사실혼 배우자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재산을 나눠받으려고 사실혼 파기를 선언하고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배우자가 사망하고 나면 원칙적으로 상속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재산분할을 청구하더라도 사실혼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정사건 전문 이현곤 변호사는 "사실혼 배우자가 결혼생활과 재산증식·유지에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혼 배우자에 상속권 인정하면?

법조계는 최근 들어 나타나는 여러가지 동거 형태에 대한 기준부터 정립해야 사실혼 판단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구태 조선대 법대 교수는 "남녀의 공동생활 관계는 매우 다양해지고 있는 반면 법원은 사실혼 여부를 판단할 때 지나치게 단순한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며 "혼인 의사의 유무만 앞세우기보다 실제 동거관계가 어땠는지에 초점을 맞춰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배우자 사망 후 나타나는 재산 문제도 외국 사례를 참조해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스웨덴은 사실혼 상대방이 사망했을 경우 상속권은 인정하지 않지만 상속재산에서 일정 금액을 받을 권리는 인정한다. 캐나다의 일부 주에서는 사실혼의 경우에도 법률혼 후 이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양권을 청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법률구조1부장은 "사실혼 관계로 인정되면 공무원연금 분할도 가능한 게 현실인데, 개인재산은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느냐"며 "어느 정도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법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법무법인 바른의 김상훈 변호사도 "우리 법처럼 사실혼 여부만 따진 뒤 사실혼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 보호도 해주지 않는 것은 가혹하다"며 "동거 형태와 목적에 따라 단계별로 권리를 보호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사실혼 배우자의 상속권을 인정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역효과에 대한 지적도 있다. 자식과 재산 문제로 갈등을 빚기 싫어 별 수 없이 사실혼을 택하는 노인들의 경우가 그렇다. 배우자의 상속권이 법적으로 일부라도 인정된다면 이 노인은 사실혼 관계마저 유지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이 변호사는 "아픈 사실혼 배우자를 성실히 간호했거나 한쪽이 경제능력을 완전히 잃었을 때처럼 경제적으로 배려해줘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만한 범위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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