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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리포트] "5년간 경쟁사 못 가"…'전직금지 약정' 지켜야할까?

근로자 '전직금지' 약정 자체는 유효…제한기간 너무 길면 대부분 무효

황국상 기자, 백인성 (변호사) 기자 2017.08.20 05:00

# 기능성 염료를 만드는 A사에서 2006년부터 기술연구소 부장으로 일하던 B씨는 2008년 퇴직 후 동종 제품을 만드는 업체를 차렸다. 그런데 B씨는 A사 입사 당시 회사 정관의 목적 사업에 명시된 제품과 관련된 사항의 비밀준수는 물론 퇴사 후 최소 5년 이내에 동종업계로 전직하거나 동종회사를 설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B씨는 그 대가로 1000만원 상당의 주식을 받았다. 앞으로 서로 경쟁하는 것을 막는 이른바 '경업금지(競業禁止) 약정'이다. 

A사는 이 약정을 근거로 2013년까지 B씨가 신설회사에서 일하지 말라는 가처분을 내려줄 것을 법원에 요구했다. 그러나 B씨는 "무조건적인 경업금지 조항은 직업의 자유와 근로권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생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양쪽이 맺은 이 조항은 유효할까.

이직·창업 금지를 내용으로 한 경업금지약정을 둘러싼 근로자들과 회사 간 법적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경업금지약정은 근로자가 원래 속해 있던 기업의 민감한 기술정보 또는 경쟁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비밀정보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그동안 유효한 조항으로 인정받아 왔다. 약정은 B씨처럼 A사와 비슷한 업종의 경쟁사를 새로 설립하는 것 뿐 아니라 종전 회사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회사에 취업하는 '전직(轉職)금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이를 어기면 '하루당 100만원 손해배상' 등 페널티도 붙는다.

최근에는 이같은 약정이 무효라는 판결이 적잖게 나오고 있다. 경업·전직을 금지하는 기간이 개인 직업선택의 자유나 근로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조항은 무효가 된다. 민법 제103조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손톱깎이 등을 제조·가공·수출하는 C사에서 무역부장으로 근무하던 D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D씨는 C사와 '2년간 전직금지' 약정을 맺은 것과 별도로 '3년간 거래처 단가, 기술정보 등 경영상 비밀 일체에 대한 보안 유지' 등에 대한 약정에서 서명했다. 그러나 D씨는 이를 어기고 별도의 회사를 차려 C사의 거래처에 물품을 공급했다.

이에 C사는 D씨의 약정위반을 이유로 1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1,2,3심 연속으로 패소했다. 법원은 △C사의 기존 거래처 바이어 명단, 납품가격, 아웃소싱 구매가격, 물류비 등 정보는 보호할 만한 가치가 적고 △기존 업무를 수행하던 경험을 살리는 업종에 종사하지 못한다면 D씨가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 △D씨가 경업·전직금지 약정으로 특별한 대가를 수령한 것도 아니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C사 패소 판정을 내렸다. D씨에 대한 경업·전직 금지약정은 무효가 됐다.

그러나 법원은 산학협력단 소속으로 특정 기업의 경쟁력 있는 핵심기술 정보를 다루던 직원에 대한 1년간의 전직제한 관련 사건, 대형 회계법인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전직금지 대가로 5000만원을 수령했음에도 다른 회계법인으로 옮기고 직원들에게 전직을 권유한 사건 등에서는 근로자가 아닌 회사 측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판례에 따르면 근로자와 회사 간 경업·전직금지 약정이 유효한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용자의 이익 여부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 △퇴직하게 된 경위 △경업·전직 금지 대가의 지급 여부 등이다.

법원이 경업·전직 기간을 단축하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E사의 해외 자회사에서 법인장으로 근무하던 F씨가 2년의 경업·전직 금지기간을 위반했다는 점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법원은 △F씨가 회사를 옮긴 시점이 E사의 경영진 교체기로 불안감이 커졌을 때라는 점 △전직·경업 금지의 대가로 E사가 F씨에게 지급한 대가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약정 유효기간을 1년으로 제한했다. 

B씨의 경우도 법원은 전직금지 기간을 5년이 아닌 3년으로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봤다. 전직약정 자체는 유효하지만 A사가 주장하는 5년의 전직제한 기간을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그 대가로 B씨에게 지급한 1000만원 상당의 주식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변호사는 "어지간한 영업비밀을 보유한 핵심 연구원급이 아닌 이상에는 대리급 일반 직원의 경우 3~6개월, 부장급의 경우 1년 정도가 한계"라며 "그보다 더 긴 기간은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근로계약서에 이러한 조항을 넣는 건 해당 근로자가 전직을 생각하지 않도록 심리적 압박감을 주기 위해서다. 한 기업의 법무담당 관계자는 "전직금지 약정이 무효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더라도 법을 잘 모르는 근로자에겐 어쨌든 압박용으로 유효하다"며 "자필로 해당 조항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에 근로자가 구속되기 때문에 문구를 넣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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