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살롱] '부익부, 빈익빈' 부르는 인지대

황국상 기자 2017.09.18 05:00
대법원 청사 전경 /사진제공=뉴스1

A씨는 얼마 전 손해배상 소송에서 1,2심 연달아 패소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습니다. 실제 손해를 본 금액은 20억원인데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할 때 그가 손해배상을 청구한 금액은 10억원이었기 때문입니다.

A씨가 소가를 대폭 줄여 소송을 진행한 이유는 바로 인지대 때문입니다. 소가(소송가액)가 20억원일 때 1심 소송을 진행할 때 인지대는 755만5000원입니다. 1심에 불복해 2심을 제기할 때는 인지대가 50% 올라가 1133만2000원(1000원 미만 절사)이 됩니다. 대법원까지 올라갈 때는 1심 인지대의 2배인 1511만원으로 껑충 뜁니다. 1,2심에서 패소한 A씨는 자신감이 위축됐고 상고심을 제기할 때는 소가를 반으로 줄여 소송을 냈습니다.

A씨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한 B변호사는 "하급심에서 잇따라 패소하면서 소송을 계속 끌고 나가도 될지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대법원에까지 소송을 끌고 갔지만 소송을 진행할 때 드는 비용이 현실적인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소가를 낮췄다는 얘기입니다. 법리싸움에서는 이겼지만 현실적 부담으로 A씨가 구제받을 수 있었던 금액은 당초 주장했던 것의 절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민사소송을 진행할 때 법원은 당사자와 소송관계인에게 소송진행 비용을 물리는 '재판유상주의'를 적용합니다.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당사자가 내고 법적 권리를 다투라는 얘기입니다. 

인지대는 법원의 인적·물적설비의 이용료이기도 합니다. 소가가 1000만원 미만일 때는 그 금액의 0.005를 곱한 금액이 인지대가 되는데 소가가 늘어날수록 그 부담도 커집니다. 소가가 10억원이 넘어갈 경우 인지대는 소송가액에 0.0035를 곱한 금액에 55만5000원을 더한 금액이 됩니다. 인지대의 상한액은 없습니다.

그런데 A씨의 경우처럼 인지대는 소송을 제기하려는 당사자들이 소송을 꺼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인지대 부담 때문에 실제 소송을 제기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테크닉이 바로 일부만 청구하고 나중에 청구금액을 늘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체 손해금액의 일부만 상대방에게 청구했다가 재판에서 법리다툼을 벌여 승소할 것 같으면 나머지 손해배상액을 한꺼번에 더해서 소송을 진행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10억원을 손해본 이가 실제 소송을 제기할 때는 2억원어치만 걸고 소송을 시작했다가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청구금액을 10억원으로 올리는 식입니다.

소송을 거는 쪽에서 인지대 규정을 이용한 전략을 짜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C회사가 D,E,F 노동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승소가 어느 정도 예견됐을 때 소송 이외의 경제적 부담을 안기려고 할 때 구사하는 전략입니다. 

지난달 대한변협 주최 '인지대 감액을 위한 토론회'에 참가한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에 따르면 현대차는 2010년 하반기 사내하청 방식으로 근로를 제공하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공장점거 농성에 참가한 근로자들을 상대로 7건의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공장점거 농성은 1회였는데 이에 참가한 근로자들을 소속회사 등으로 쪼개 별건의 소송을 낸 것입니다.

회사가 1심 소송을 제기할 때 내야 하는 인지대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1심에서 패소한 근로자들은 당장 항소심 인지대를 내지 않으면 소송에서 본인들의 주장을 제기할 기회마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 처장은 "현재 고법에 걸려 있는 3건의 항소심은 모두 동일한 공장점거 파업을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라며 "3개의 사건이 1개의 사건으로 소송이 제기됐을 때 항소심 인지대는 한 차례 납부하면 그만이었겠지만 회사가 피고를 달리해서 세 사건으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근로자들은 삼중으로 항소심 인지대를 납부해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근로자들이 항소를 포기하면 당장 손해배상금 강제집행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인지대 부담이 어떻게 당사자에게 압박을 줄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이 때문에 변호사들은 줄곧 인지대 감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변호사들의 이같은 주장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소송이 많아져야 수입이 늘어나는 변호사들이 소송증가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A씨의 사례나 현대차 공장점거 파업에 참여해 소송을 진행 중인 근로자들의 사례는 법적다툼을 진행할 때 '인지대'라는 법리 이외의 변수가 실제 소송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난달 대한변협의 '인지대 감액 토론회'에서 최정민 변호사(대한변협 인지대 감액 추진 소위원장)는 "인지대 상한이 없어서 소가에 비례해 인지액 부담이 커지고 그로 인해 당사자가 소송제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면 인지대가 과다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해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재판유상주의를 채택한 근거나 그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소가에 비례해 일률적으로 인지대를 정하도록 하고 심급이 올라갈수록 인지대 부담을 증가시키는 현행 제도는 소송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약자들로 하여금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주요 선진국의 경우 인지대를 소가와 무관하게 정액으로 정하거나 그 상한액을 규정해 인지액이 우리보다 저렴하다고 볼 수 있다"며 "인지액 정액제나 인지액 상한설정 등을 통해 국민의 비용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여전히 법원과 변호사 사이의 입장 차이는 큽니다. 불필요하고 성공 가능성이 낮은 소송을 방지하고 소송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게 법원 측의 설명입니다. 소송남용과 부당제소를 그대로 방치하면 한정된 사법자원의 낭비를 초래해 정당한 권리자의 재판청구권에 악영향을 준다는 점, 정당한 권리자라면 고액의 인지대 때문에 소송 자체를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A씨와 현대차와 소송을 진행 중인 근로자의 사례는 '유전유재, 무전무재'(有錢有裁, 無錢無裁, 돈이 있는 사람만 재판에서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다)라는 안진걸 처장의 지적이 이미 현실적 문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로 출범할 사법부는 높은 문턱 때문에 법원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억울한 이들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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