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살롱] 조영남의 그림은 '사기'였나?

"미술품 팔 때 조수 썼다고 알릴 의무 있나" 논란…"미술품 거래, 합리적 기준 제시돼야"

김종훈 기자 2017.10.23 05:00

조영남씨./ 사진=뉴스1

화가 겸 가수 조영남씨(72)의 '그림 대작'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미술계와 법조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습니다. 재판부는 18일 '부작위에 의한 사기'라는 판단과 함께 조씨에 대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조씨는 유죄 판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과 함께 곧바로 항소했는데요. 조씨는 2심에서 판결을 뒤집을 수 있을까요? 사건을 처음부터 한번 살펴봅시다.

조씨는 스스로를 화가 겸 가수를 뜻하는 '화수'로 칭하면서 화투 소재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1973년 첫 개인전 이후 40여회의 전시회를 열 만큼 나름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조씨는 화투를 직접 잘라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썼는데, 미술계의 반응은 독창적이라는 호평과 조악하다는 악평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조씨는 2009년 알고 지내던 뉴욕 출신 무명 직업화가 송모씨에게 자신의 그림을 회화로 그려볼 것을 제안합니다. 조씨는 송씨의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고, 그때부터 송씨에게 화투 그림을 받아 덧칠 작업을 한 뒤 자기 이름으로 전시했습니다. 미술계는 "표현이 다양해지고 섬세해졌다"고 호평했습니다.

미술계의 호평과 조씨의 유명세 덕택에 화투 그림은 고가에 팔려나갔습니다. 1점에 최대 1200만원까지 거래됐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려준 송씨도 큰 돈을 벌었을 것 같지만, 1점에 수고비 1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씨와 사이가 틀어진 송씨가 검찰에 사건을 제보하면서 조씨의 명성은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송씨 외에 다른 화가를 쓴 사실도 드러났죠. 결국 조씨는 전부 자기가 직접 그린 것처럼 구매자들을 속여 그림 26점을 팔아 1억8000만원을 챙긴 사기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법정에서 조씨는 표현 작업보다 아이디어를 중요시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사조이고, 구매자들은 작품의 독창성과 작가의 인지도를 보고 작품을 산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누가 붓칠을 더 많이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긴데요. 그럼에도 재판부는 조씨의 행위를 '사기'로 봤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부는 △조씨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회화에 속하고 △표현 작업은 대부분 송씨가 맡았으며 △조씨는 송씨의 존재와 역할을 구매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구매자들은 조씨가 대부분 직접 그린 것으로 잘못 알고 그림을 샀기 때문에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송씨가 표현 작업을 맡았다는 사실은 미술작품 거래에 있어 설명해야 할 가치가 있는 정보에 해당한다"며 "조씨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구매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고지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아 구매자들을 부작위(해야 할 조치를 하지 않음)로 기망했다"고 판시했습니다.

법조계와 예술계가 주목하는 것은 조씨에게 자기 작품과 작업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었는지, 즉 '고지의무'가 있었는지 여부인데요. 예술계엔 아직까지 이에 대해 특별한 합의나 관행이 없다고 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예술계 전문가는 "그런 합의나 관행은 따로 없다"며 "보통 작품을 거래할 때 그런 것은 따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법조계 일각에선 예술계 차원의 합의나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조씨에게 고지의무를 위반한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한 변호사는 "미술작품 거래에서 조력자의 존재에 대한 고지의무가 있는지, 있다고 해도 어떤 정보를 고지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예술계의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재판부가 함부로 '부작위에 의한 사기'를 선언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현대미술에선 조수를 썼는지 여부는 작품의 본질과 전혀 무관하다고 본다"며 "혐의의 본질적인 내용이 의심스러운 만큼 상급심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판결이 바뀔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예술계 일각에선 조씨 사건을 계기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술시장 규모가 연간 작품 거래가 기준으로 약 4000억원에 이를 만큼 성장했음에도 미술품 거래에 대한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죠. 재판부가 판결 선고에 앞서 "이 판결을 계기로 예술계에서 창작이나 거래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기준이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논의를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입니다.

전문가들은 작품 구매자들도 예술계의 한 주체로서 이 같은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술 전공의 한 대학교수는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것도 작품 구매자, 후원자들의 역할"이라며 "이런 역할을 맡아줘야 할 구매자들이 대중스타에게 몰려가면서 시장을 교란시켰다는 게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술작품의 구매와 투자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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