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을 꿈꾼 '따뜻한 리더' 김명수 대법원장

[판사 사용설명서-김명수 대법원장]

양성희 기자 2017.10.24 05:00

2015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의 법원 경위 L씨가 법정에서 난동부리던 사람이 던진 의자에 맞아 병원 신세를 졌다. 재판부 쪽으로 날아가는 의자를 막으려다 벌어진 사고였다. 그러나 L씨를 직접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판사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다친 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경위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였다.

L씨가 병실 침대에 쓸쓸히 누워있던 어느 날, 다른 재판부의 부장판사가 후배 판사들을 이끌고 깜짝 병문안을 왔다. L씨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아간 이 부장판사는 법원을 설득해 L씨가 표창을 받도록 힘쓰기도 했다. 그 부장판사가 바로 김명수 대법원장(58·사법연수원 15기)이다. 김 대법원장과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모두 그를 '따뜻한 리더'로 기억하는 이유다.

◇배석판사 전화번호 모르는 부장판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을 꼽으라면 단연 법원이다. 그런 법원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서울대 출신의 50대 남성 판사'들을 줄여 '서오남'이라고 부른다. 법원의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서오남'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꼰대'에 가깝다. 그러나 '서오남' 중 한명인 김 대법원장은 예외다. 법원 내부에선 평판이 나쁜 재판장을 가리켜 '벙커'라 부른다. 그런 재판장과 같은 재판부에 배정되면 "벙커에 빠졌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을 두고 벙커라고 부르는 이는 없다.

김 대법원장은 부장판사 시절 배석판사들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업무시간 이후 일과 관련해 후배들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후배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는 재판부 생활이 끝난 뒤에야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김 대법원장과 함께 일했던 판사들은 그를 '탈권위'와 '소탈함'의 대명사로 기억했다. 함께 식사하러 갈 때 엘리베이터 버튼을 먼저 누르고 식당에서 수저나 물컵을 준비하는 건 항상 김 대법원장이었다. 대법원장이 된 뒤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이 함께 셀카(셀프 카메라)를 찍자고 하면 언제나 웃으며 흔쾌히 응한다. 대법원의 한 심의관은 "보수적인 법원에서 대법원장에게 셀카를 찍자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소탈한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후배판사 대변하는 '민원 해결사'

김 대법원장은 31년간의 판사 생활 동안 '후배들의 대변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10년 서울고법은 배석판사들의 전문성을 키우겠다며 한 부서에 배치되면 2년간 근무하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전까진 형사부 1년, 행정부 1년과 같은 식으로 매년 근무처가 바뀌었다. 

배석판사들은 2년 근무안에 불만이 컸지만 눈치를 보느라 누구 하나 대놓고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때 후배들을 대신해 나선 이가 당시 부장판사였던 김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법원장과 수석부장들에게 "판사들의 의견 수렴 없이 일률적으로 방침을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2년 근무안 저지에 앞장섰다. 

법원장으로 있을 땐 '민원 해결사'를 자처했다. 춘천지법 판사들에게 그에 대해 물으면 입을 모아 관사 보수 얘기를 꺼낸다. 그는 판사들의 요구로 노후한 관사의 수리를 결정하고 현장을 일일이 방문하며 공사를 꼼꼼히 챙겼다. 연립관사 맨 위층인 3층에 사는 판사들이 여름에 덥지는 않은지 등을 하나하나 물어가며 공사에 반영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사진=뉴스1

◇"할아버지 육아휴직제 도입해야"

김 대법원장은 '애처가'에 '손주 바보'다. 수준급 서예 실력을 갖춘 아내 이혜주씨의 작품을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는 게 큰 낙이다. 시간이 날 땐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을 즐긴다. 요즘엔 손주 2명의 재롱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사석에선 "할아버지 육아휴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농담을 할 정도다. 
그의 학창시절 꿈은 전투기 조종사였다. 그러나 시력이 갑자기 나빠지면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럿의 꿈은 지금도 김 대법원장의 가슴 한켠에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 김 대법원장에게 가장 큰 이상은 '좋은 재판'이다. 그는 12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고 신뢰받는 길은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는 ‘좋은 재판’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젠 존경받는 판사이자 절친한 동료였던 고(故) 한기택 부장판사의 못다 이룬 꿈까지 짊어지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목숨 걸고 재판한다"는 신조로 약자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던 인물이다. 

[인간 김명수]
좌우명 : 처인천의(處仁遷義·어짐을 근본으로 하고 나아가 옳음을 구한다.)
종교 : 불교. 법조인 불자 모임 '서초반야회' 회장 출신
취미 : 등산. 수원지법·서울고법 등산회장 출신. 
주량 : 한계가 목격된 바 없음.

[프로필]
△1959년 부산 출생 △부산고, 서울대 법대 △서울지법 북부·서부·동부지원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법·서울중앙지법·서울북부지법·특허법원 부장판사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춘천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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