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했다고 회사에 알렸더니 대뜸…"

[Law&Life-근로기준법 사각지대 ①] '성심병원 장기자랑'으로 수면위 떠오른 '직장갑질'…"회사 취업규칙 꼭 읽어라"

박보희 기자 2017.11.17 05:01


"병원은 진짜 무법지대입니다. 임산부가 임신했다고 하면 축하한다는 말 대신 야간근로 동의서 작성하라고 내밉니다."(직장갑질119 제보 중)

카카오톡 공개채팅방이 문을 열자 제보가 쏟아졌다. 오픈 보름만에 채팅에 참여한 이들만 1000여명을 넘어섰다. '직장갑질119' 얘기다.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노동건강연대, 사무금융노조, 알바노조 등 전문가 241명이 함께하는 직장갑질119는 지난 1일 문을 열었다.

간호사들에게 노출댄스를 강요했다는 이른바 '한림대 성심병원 논란'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매년 재단 체육대회 행사에 간호사들을 강제 동원하고, 장기자랑에서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강요했다는 내용이다. 성심변원 뿐만이 아니다. 초과근무수당 미지급, 임금체불, 재단 비리까지 연일 새로운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 근로기준법 사각지대 '병원'

"다른 대학 병원도 다르지 않아요. 송년회 장기자랑은 물론이고 의과대학장 고희 때에도 장기자랑하라고 해서 근무 끝나고 연습했습니다. 왜 우리 간호사가 춤을 춰야하는 건지 모르겠네요"(페이스북 '간호학과, 간호사 대나무숲' 페이지)

성심병원을 시작으로 다른 병원들 역시 다르지 않다는 내부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사실 의료계의 부당노동행위와 인권침해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2015년 1월 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보건의료분야 여성종사자 모성보호 등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병원 내 부서별 회식 자리에서 여성 간호사가 남성 의사들을 위해 춤을 추도록 동원되거나 '기쁨조' 등으로 불렸다는 증언이 적지 않다.

간호사들이 2명 이상 한번에 임신하지 않도록 순번을 정해서 한다는 이른바 '임신순번제'도 오랜기간 논란이 돼 왔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다. 정부는 지난해말 이같은 관행을 근절하기위해 집중 감독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직장갑질119에 제보한 한 간호사는 "동시에 두 명이 임신을 하면 부서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다"며 "육아휴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임신을 확인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임신을 해도 나이트(야간) 근무를 하겠다는 각서에 사인을 하고 오는 것이었다"고 했다. 

근로기준법 제70조에 따라 임산부는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휴일에는 원칙적으로 근무를 할 수 없다. 다만 임신 중인 여성이 명시적으로 청구하는 경우 근로자의 건강 및 모성호보를 위해 시행 여부와 방법을 협의해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범죄지만, 실제 현장에선 무의미하다.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 "지옥문이 열렸다"

"호텔에서 일하는데 사장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숯불 올리는 일을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하라고 하는데, 문제가 없는 건가요?"

"음료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틀 동안 사장님과 친인척들을 위한 김장을 한답니다. 원래 근로시간이니 김장하는 것도 당연한 건가요? 임원들은 토요일에 (사장) 친척들에게 배달도 하더군요."(직장갑질119 제보 중)

직장갑질119에 올라온 제보들이다. 비단 병원 뿐만이 아니다. 직장갑질 제보는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한다는 A씨는 "사내 공연 티켓을 직원들에게 강매하고 후원모집을 강요한다"고 제보했다. "특정 정당에 후원금을 내라는 강요를 받았다"는 제보도 나왔다. 

부당한 처우를 참지 못해 퇴사 통보를 하자 퇴직금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휴가를 사용한 만큼 돈을 내고 나가라고 하는 사업주도 있었다. 모두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들이다. 실제 직장갑질119에 가장 많이 접수된 상담은 '포괄임금제, 시간외 수당 등 임금체불'(19%) 문제였다. '직장 내 따돌림, 상사의 폭언, 인격모독'(18.3%) '노동시간 위반'(15.4%)이 뒤를 이었다.

직장갑질119에서 상담을 진행 중인 윤지영 변호사는 "병원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이런 부당사례들이 보편화돼 있는데, 그중 병원 쪽에서 먼저 공개가 된 것 뿐"이라며 "이제 지옥문이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 내 부당행위를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고용노동부지만 근로감독관이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익명의 제보자는 "스무번 넘게 노동부에 신고했지만 바뀐 것이 없었다"며 "노동부와 싸우는 게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 오진호 운영위원은 "하루에 20통 이상의 이메일이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며 "신고된 사례들을 정리해 고용노동부 진정, 인권위 제소,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등 적절한 절차를 거칠 예정"이라고 했다. 정현철 운영위원은 "자신의 근로계약서와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취업 규칙을 꼭 읽어야 한다"며 "그것만으로도 사정이 나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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