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도 모르는 판사들만의 '비밀'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양형기준 공개하면서 '구속 기준'은 꽁꽁 숨기는 법원

이상배 기자 2018.01.04 05:00

"솔직히 재판도 팔자소관이다. 판사도 사람인지라 젊을 땐 엄격했다가 나이가 들수록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고참 판사라면 집행유예로 풀어줄 사건도 신참 판사한테 가면 실형을 받는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전직 대법관이 한 말이다. 판사에 따라 판결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젊은 판사에게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한 사람들은 억울하고 화가 날 법한 얘기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젊은 판사들이 가혹하다는 게 아니다. 고참 판사들의 양형이 약한 편이라는 게 요지다. 좋게 말하면 균형감각이 생기기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의 탁류와 어느 정도 타협한 탓이다. 그렇게 보면 젊은 판사가 내린 판결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전직 대법관도 머쓱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가장 정의로운 판사는 젊은 신입 판사다."

법원·검찰을 출입하는 법조 기자들에겐 2가지 불문율이 있다. 첫째, 압수수색 계획을 미리 알더라도 기사로 쓰지 않는다. 피의자가 기사를 보고 증거를 인멸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다. 둘째, 법원의 판결은 가급적 비판하지 않는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라면 더욱 그렇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떠받치는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의 권위까지 흔드는 건 사회 전체에 좋지 않다는 공감대가 깔려있다.

그렇다고 법원의 판결이 항상 완전무결한 건 아니다. 판사도 때론 오판을 한다. 약촌오거리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0년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최모씨(당시 15세)는 항소심에서 유죄가 확정돼 꼬박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최씨는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며 누명을 벗었다. 이 과정에서 폭행과 감금을 동반한 검찰과 경찰의 부실·강압 수사가 드러났다.

그나마 양형기준이 공개돼 있는 본안 재판은 나은 편이다. 본안 재판에 앞선 '구속영장 실질심사'(구속전 피의자심문)는 기준조차 공개돼 있지 않다. '영장재판 실무편람'이란 지침서가 있지만 판사들 말곤 누구도 볼 수 없다. 영장전담 판사들이 피의자 구속 여부를 놓고 사실상 견제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배경이다. 
검찰이 10여전부터 법원에 구속영장 발부 기준 공개을 요구하고 있지만 법원은 요지부동이다. 구속 여부 결정을 위해선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만큼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구속영장 심사보다 더 복잡한 본안 재판에 대해 양형기준을 공개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법원이 주요 사건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때마다 영장전담 판사들은 누리꾼들의 십자포화에 시달린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구속해야 할 피의자를 놔주는 게 아니라 죄 없는 피의자를 구속시키는 데 있다. 민영진 전 KT&G 사장은 2015년 12월 협력업체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법원은 "범죄 혐의가 소명된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민 전 사장은 이후 1·2심에서 잇따라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끝내 무죄가 확정됐다.

구속영장 심사는 사실상의 예비 재판이다. 판사들은 피의자가 본안 재판에서 무죄 또는 집행유예가 예상되면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실형이 예상되면 구속시킨다. 그런데 구속된 피의자에게 결국 무죄가 확정된다면 애초 피의자를 구속시킨 판사의 판단이 틀렸다는 얘기가 된다. 법원이 처음부터 정교하게 마련된 구속 기준을 공개하고 이 기준에 따라 엄정하게 구속 여부를 결정했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검찰은 구속영장을 둘러싼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영장항고제 도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영장항고제는 피의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해 인권 침해 우려가 크다. 일단 구속시킨 뒤 보석금을 내면 풀어주는 미국식 보석조건부 영장발부제 역시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결국 유일한 해법은 구속 기준 공개 뿐이다. 구속 기준을 공개하지 않는 게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인지, 판사들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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