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해서 죄송하다"던 가해자, 말 바꿔 '무고'로 맞고소

[그일, 그 후] 법원, '분위기 좋았다'는 가해자 말은 인정…'도망쳤다'는 피해자 말은 안 믿어

박보희 기자 2018.02.14 04:00

"제가 추근덕거리고 했던 거는 진짜 죄송해요. 술이 많이 취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술먹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손을 붙잡고…"
"손 붙잡은 건 기억나면서 그 외에는 기억이 안나요?"
"아니요. 다 기억이 납니다."
"뭐가 기억나는데요?"
"제가 그렇게 뽀뽀하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왜 팀장님 계실 때는 부인하셨어요? 저는 덕분에 일을 관둬야 돼요."(2014년 5월27일, 법원에 제출된 녹취록 중)

2014년 5월27일 오후, 김현정(가명)씨 앞에서 8살 위인 유부남 직장상사 A씨가 잘못을 빌었다. "잘못했다"던 A씨는 2년여 뒤인 2016년 현정씨를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성추행 피해자'에서 '무고 가해자'로 입장이 바뀐 현정씨는 2018년 현재까지 4년째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회식인줄 알았지만 단둘이…'기습 입맞춤' 한 유부남 직장상사"

그 일은 2014년 5월26일 저녁, A씨와의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현정씨는 입사 한 달 후쯤 전임자 소개로 A씨를 알게됐다. 그날 오후, A씨는 "오늘 약속없음 술한잔? 딴데 알리지 말고"라는 문자를 보냈다. 선약이 있다는 전임자 말에 둘이 만나기는 부담스러웠던 현정씨 역시 선약을 핑계로 거절했다.

하지만 면접 때부터 들었던 "남자 직원이 많으니 여직원인 네가 잘해야 한다. 회식자리에 빠지면 안된다"는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나흘 뒤인 26일 A씨와 현정씨는 저녁에 만났다. 당일 낮, 이미 다른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A씨의 연락에 다른 직원들과 함께하는 회식이라고 생각해 나간 자리였지만, 다른 직원은 없었다.

"술자리부터 불편했어요. A씨가 아이가 안생긴다며 성관계같은 이야기도 하고, 옆 자리로 와 귓속말을 하기도 했거든요. 내가 예민한가 싶은 생각도 들고, 직장선배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아서 내색하진 않았어요. 잘 마무리하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술자리 후, 택시가 잡히지 않아 주변을 40여분간 배회했다. 그 사이 A씨는 현정씨의 손을 잡기도 했고, 어깨에 팔을 두르기도 했다. 현정씨는 "불쾌했지만 술에 취해하는 실수려니, 다음날이면 (A씨도) 후회하겠거니 생각해 참고 넘겼다"며 "(A씨는) 직장선배이고 나는 입사 한 달밖에 안된 계약직인데 '먼저 집에 갈게요'할 수 없었다. 선배를 먼저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택시를 잡으려는데 A씨는 자꾸 골목길로 가려했다. 참다못해 옷을 살짝 잡아 끌기도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러다 A씨가 편의점에 들어가 따라갔어요. 먹을 것을 사서 나왔는데, 근처에 버려진 소파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겠다며 앉으라더니 갑자기 끌어당겨 입을 맞췄어요." 
◇"깜짝 놀라 도망…택시 따라타자 내려서 다른 택시타고 '빨리 가주세요'"

현정씨는 "깜짝 놀라 뿌리치고 큰 길로 나왔다"고 말했다. 큰 길로 나오니 택시가 있어 올라탔는데 A씨가 따라 탔다. 현정씨는 곧바로 택시에서 내려 뒤따라 오던 다른 택시를 잡아탔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번째 택시 기사는 "(현정씨가) '직장 상사가 2차를 가자고 한다. 빨리 출발해 달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현정씨가 택시를 타고 혼자 떠나자 A씨는 서너차례 전화를 했지만 현정씨는 받지 않았다. 통화가 안되자 A씨는 문자를 보냈다.

"모든 것이 예상되지만 어쨌든 잘 들어가고…다시 내일 보자~ 걱정되지만 일단 안녕"

현정씨는 20분쯤 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부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 사실을 알리고 회사에 다니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손잡고 어깨에 손 올리고…이런건 참고 넘어가려 했어요.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데 잘 다니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입을 맞추는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어요."

다음날인 27일 현정씨가 출근을 안하자, 같은 계약직인 B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왜 회사를 그만두는지 이야기하다 같은 사람에게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B씨는 "내가 참고 넘어가니 너에게 또 그런 것 보면 상습범인 것 같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성추행은 내가 당했는데, 왜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죠?")

그날 오후 현정씨는 부서 팀장과 A씨, B씨 등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현정씨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팀장이 없을 때는 '이런 행동을 해 미안하다'고 했지만 팀장이 있을 때는 '기억이 안난다'며 말을 바꿨다. 사과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결국 성추행 신고를 결심했다.

◇"'성추행' 신고 후 입사 두 달만에 '퇴사'…정신과 치료까지"

"신고를 결심하고 여성단체 등을 통해 상담을 받았는데 증거가 부족해 혐의 입증이 쉽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제대로 된 사과라도 받고싶었어요."

상담 결과대로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증거가 없어 재판에 넘길 수 없다는 얘기다. 다만 불기소이유 통지서에 '무고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내용도 함께 담았다. 검사는 A씨의 성추행을 인정할 증거는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현정씨가 무고, 즉 'A씨를 형사 처벌 받게하려고 허위사실을 신고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본 것이다.

"잘못했다"던 A씨는 불기소처분을 받자 현정씨를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역시 '무고로 보기 힘들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은 A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사의 불기소 처분을 취소하고 법원이 재판을 열도록 한 것이다. 현정씨는 '성추행 피해자'에서 '무고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그 사이 현정씨는 회사를 그만뒀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던 현정씨가 계약직이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얻었다며 기뻐한 지 두달여 만이었다. 현정씨는 "회사의 요구로 한달간 인수인계까지 한 뒤 퇴사했다"고 말했다.

"부모님께 죄송했어요. 정말 기뻐하셨거든요. 어떻게든 잘 다니고 싶어서 참으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둘만 있는 술자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집에 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현정씨는 이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남자가 많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꺼려져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친구 소개로 일자리를 얻었지만, A씨가 무고로 고소하면서 검찰 조사, 재판 참석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퇴사했다.

◇"검찰 '무고 인정 어렵다'했지만…성추행 입증안되니 역고소 당해"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게 된 현정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어주리라 생각했다. 현정씨는 "이 사건으로 입은 피해가 너무 큰데 오히려 재판을 받게 돼 억울하고,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억울함을 꼭 밝히고 싶다"고 신청 이유를 적었다.

하지만 현정씨게 유죄가 선고됐다. 수사기관이 아닌 A씨가 직접 구해 제출한 CCTV 영상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영상에는 A씨가 현정씨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손목을 잡고 걷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이를 근거로 A씨는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 애뜻한 감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연인같다"고 했다.

"처음 손목을 잡혔을 때 뿌리치기도 했지만 계속 잡아서 나중에는 포기한 상태였어요. 사람도 없는 골목길인데 강하게 거부했다가 싸우게될까봐 무서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상에도 A씨가 제 손목을 잡고 있어요. 그런데 연인같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막혔죠."

증거로 제출된 영상에는 현정씨가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소파가 있던 장소는 없었다. A씨는 '소파'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근처 '벤치'에 앉아 이야기만 나누다 헤어졌다고 주장했다. 현정씨는 '버려진 소파'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담당 구청에 연락하는 등 수소문을 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증거 영상은 다 A씨가 제출한 것으로 알아요. 제가 신고한 후 경찰이 어떤 수사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손을 뿌리치는 영상도 있을텐데…. 술집과 소파가 있던 곳에 가봤지만 그곳에는 CCTV가 없었어요. 구청에도 연락해봤는데 원래 무단투기가 잦은 곳이어서 신고하지 않고 버린 것을 수거해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입맞춤' 없었다더니 역고소 후 '입맞췄다' 말 바꾼 A씨"

현정씨는 항소했다. 현정씨는 "성추행 사실을 고소한 것일 뿐 A씨의 성추행이 증거가 부족해 범죄로 증명되지 않았어도, 무고를 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현정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현정씨와 A씨 모두 '어딘 가에 앉아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소파'와 '벤치'로 진술이 나뉘자 현정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얘기만 했다'는 A씨의 말을 믿은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되고 걱정된다"는 A씨의 문자는 "다른 약속을 가는 것 같다고 예상했고, 늦게 들어가는 게 걱정된다는 뜻"이라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현정씨가 택시를 타고 떠난 뒤 서너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한 이유 역시 "걱정이 돼서"라는 A씨의 주장을 법원은 믿었다. 

A씨는 무고를 주장하면서부터 "현정씨가 먼저 입을 맞췄다"고 주장했다. 성추행 혐의로 조사받을 때는 하지 않았던 주장이다. "왜 경찰에서 입을 맞췄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느냐"는 변호사의 추궁에 A씨는 "아내에게 눈치가 보여서"라고 답했다. 아내에게 눈치가 보여 본인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했을 때는 '입을 맞춘적 없다'고 했던 A씨는 2년이 지나 스스로 현정씨를 고소하면서 '입맞춤이 있었다'고 주장을 바꾼 것이다. 법원은 A씨의 말을 믿었다.

A씨는 "잘못을 추궁당하는 와중에도 왜 '네가 먼저 입을 맞추지 않았느냐'고 반박하지 않았느냐"는 변호사의 질문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답했다. 역시 법원은 A씨의 말을 믿었다.

◇"'여자 혼자 타 빨리 출발해달라 말했다'는 택시기사 진술에도…'도움 요청 안해 이상하다'는 법원"

2심 재판부는 도리어 A씨가 "뽀뽀하고, 미안하다"고 말한 녹취록을 현정씨가 유죄인 증거로 봤다. 재판부는 "'A씨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아 고소했다'고 하는데 A씨가 사과한 것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의 사과를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현정씨가 '무고'했다는 근거로 본 셈이다.

현정씨는 A씨를 성추행으로 고소할 당시 '사과와 인사조치' 이외에는 합의금을 비롯해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2심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A씨가 고소를 한 동기가 '진정한 사과'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서도 "(다른 동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며 별다른 판단을 하지 않았다.

택시기사의 진술도 증거가 되지 못했다. "직장상사가 추행을 하려하니 빨리 출발해달라고 말했다"는 현정씨의 진술과 "직장상사가 2차에 가자고 하니 빨리 출발해 달라고 했다"는 택시기사의 진술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2심 재판부는 '첫번째 택시에서 내린 것'을 '성추행은 없었다'는 증거로 봤다. 2심 재판부는 "자신이 탄 택시에 A씨가 따라타자 택시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대로 하차해 다른 택시를 탔고, 그 택시기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성추행이 없었다"고 본 것이다.

현정씨는 "처음보는 택시 기사에게 다짜고짜 '이 사람이 강제로 입을 맞췄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야 했나"고 반문했다. 이어 "'빨리 출발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내 얘기를 듣고 택시기사는 A씨가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출발해 벗어날 수 있었다. '분위기'가 좋았으면 함께 택시를 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나"고 토로했다. 

그 날 일에 대해 문제제기했다는 이유로 현정씨는 4년째 경찰과 검찰과 법원을 오가고 있다. 현정씨에게 유죄가 선고되자 A씨는 현정씨에게 1억5000만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현정씨는 그래도 법원이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대법원 판단을 다시 한 번 받아볼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바뀌기 힘들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제가 너무 억울해요. 분명 성추행을 당해 신고를 했는데 수사기관이 입증해주지 못했다고 피해자가 범죄자가 되는 거잖아요. 제가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고, 돈이 많아서 비싼 변호사를 선임했으면 이렇게 억울한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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