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준 건 36억, 받은 건 72억…어떻게 이런 일이

[재판의 법칙-뇌물죄] 판사마다 다른 뇌물 액수…뇌물 준 사람은 '무죄', 받은 사람은 '유죄' 될 수도

한정수 기자, 이보라 기자 2018.03.13 05:00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비선실세' 최순실씨에 건넨 뇌물 36억여원. 최씨가 이 부회장으로부터 받은 뇌물 72억여원. 
이 부회장의 2심 판결과 최씨의 1심 판결을 요약하면 이런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준 돈보다 받은 돈이 더 많은 게 가능할까?

최씨와 공범으로 엮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판결은 어떨까? 박 전 대통령은 징역 30년을 구형받고 다음달 6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판사마다 다른 뇌물 액수

박 전 대통령 등이 받고 있는 혐의 가운데 가장 무거운 뇌물죄는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대가성이 있는 부당한 금품이나 이익을 받을 때 성립한다. 이때 뇌물을 준 사람도 함께 처벌된다. 뇌물죄가 성립되려면 공무원이 직무에 관련해 뇌물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고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부회장은 최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승마 지원 등의 명목으로 총 433억원을 지원하거나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등에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뇌물을 제공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부회장의 2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최씨 측에 제공한 용역비 36억여원만을 뇌물로 인정했다. 정씨가 실제 사용한 마필의 소유권이 삼성전자에 있다고 보고 그에 대해선 뇌물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유다.

그러나 최씨의 1심 재판부는 다르게 봤다. 삼성전자가 제공한 마필 역시 형식상 소유권이 삼성전자에 있을 뿐 실제 소유권은 최씨 측에 있다고 보고 총 72억여원을 뇌물로 인정했다. 이른바 '배달사고'가 없는 한 준 뇌물 액수와 받은 뇌물 액수가 다르다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재판부마다 뇌물 인정 여부에 대한 판단이 다른 것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뇌물범죄의 특성상 사실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최진녕 법무법인 이경 대표변호사는 "뇌물죄는 금품이 오가는 행위 자체가 은밀하게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민영 변호사도 "통상의 뇌물죄는 공여자와 수수자만이 범죄 당시 상황을 알고 있다"며 "이들이 정확히 진술을 하지 않으면 주변 정황 등으로 사실관계를 유추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했다.

◇고무줄 같은 '직무관련성'


뇌물죄 성립 요건인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에 대한 판단도 재판부마다 다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식 대박' 논란을 일으킨 진경준 전 검사장과 김정주 NXC 대표 사건이다. 진 전 검사장은 2006년 11월 당시 시가 8억5000여만원의 넥슨재팬 주식을 김 대표로부터 무상 취득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진 전 검사장과 김 대표의 뇌물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두 사람이 검사가 되거나 사업을 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온 점, 김 대표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줬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 등이 근거였다. 이후 2심은 이를 뇌물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다시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문제는 김 대표가 법정에서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지만 진 전 검사장이 검사이기 때문에 돈을 준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며 "나중에 형사사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검사의 직무와 관련해 주식을 줬다고 인정한 셈이다.

이에 대해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진 전 검사장 사건의 경우 뇌물죄의 법리를 좁게 해석했다는 지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재판부 별로 충분히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단순 뇌물죄 뿐 아니라 제3자 뇌물죄의 경우에는 판단 기준이 더 복잡할 수 있다.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이라는 기존 요건에 부정한 청탁이라는 요건이 더 추가되기 때문이다. 제3자 뇌물죄는 공무원이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가 뇌물을 받은 경우에만 성립한다. 

일례로 삼성전자가 최씨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후원한 16억여원은 뇌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 부회장 재판부와 최씨의 재판부 모두 이 부회장으로부터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물 준 사람 '무죄', 받은 사람은 '유죄'?

뇌물죄의 법리와 기준이 복잡한 탓에 극단적으로는 뇌물을 준 사람은 무죄가 되고, 받은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가 대표적이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는 자신이 수사 의뢰한 사건의 재판을 맡은 김수천 전 부장판사에게 가짜 수딩젤 제조·유통업자들을 엄벌해 달라는 부탁 등과 함께 5000만원 상당의 고급 외제차와 현금 1억1500만원을 건넨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이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지만 2심은 관련 사건 피고인들이 기소도 되기 전에 정 전 대표가 금품을 공여했다는 점에서 직무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정 전 대표는 뇌물공여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반면 뇌물을 받았다고 지목된 김 전 부장판사에 대해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그는 2심에서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재판이 시작된 이후 그가 건네받은 현금 1000만원은 뇌물로 봐야한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뇌물 공여자와 수수자 중 한쪽만 처벌받는 경우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선 뇌물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 기준이 더 명확하게 정립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법원 내부적으로 뇌물죄 관련 기준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며 "뇌물죄 판단과 관련한 원칙을 구체화하고 실효성있게 적용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1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