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배제되는 성폭력

박보희 기자 2018.03.12 05:15
파란머리와 빨간머리의 사람이 절반씩 사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파란머리 사람이 빨간머리 사람을 때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참다 못한 빨간머리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맞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빨간머리 폭행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자 일각에선 "빨간머리들이 맞는 일이 없도록 빨간머리들을 마을에 들이지 말자" "오해를 사지 않도록 빨간머리들과 어울리지 말자"는 얘기가 나왔다. 분명히 가해자는 파란머리인데 오히려 빨간머리를 배제대상으로 삼는 셈이다.
'미투'(Me too) 열풍 속에 성폭력 소지를 없애기 위해 "회사에서 여자를 뽑지 말자" "여자들과 식사하지 말자"는 말이 남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오는 현실을 빗댄 얘기다. 부인이 아닌 여성과 단 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원칙을 뜻하는 이른바 '펜스룰'도 논란이 되고 있다. 

범죄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오히려 조직에서 배제하는 게 성폭력 말고 또 있던가? 실제로 직장내 성폭력 이후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회사를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부분 범죄 사건에서 사람들은 '피해자'에 감정이입하고 '가해자'에 분노하지만 성범죄는 반대다. 누구도 다른 범죄 피해자에게 '신고의 의도'를 묻지않고 합의금을 받았다고 비난하지 않지만, 성범죄는 신고하면 의도를 의심받고, 합의금을 받으면 꽃뱀이 된다. 

법정도 다르지 않다. 실제로 한 판사는 "피해자가 성추행으로 유죄를 받아낸 전력이 있는데 또 고소를 했다"며 무고를 의심했다. 반면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전력이 있던 가해자에 대해서는 "다른 사건과 연결지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량이 큰 성범죄는 합리적 의심이 조금도 있으면 안 되지만 무고는 다르다"고 말했다. 

'성폭력은 깐깐하게, 무고는 관대하게' 본다는 이중잣대를 당연한 듯 말한 셈이다. 적어도 법정 만큼은 바깥세상과 다르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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