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9년 전 '미투'…19년 만의 고해성사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미투' 성폭력 피해자 처벌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이상배 기자 2018.03.22 05:00

19년 전 대학 시절 일이다. 단과대 학생회 사무실 앞을 지나던 중이었다. 학생회 간부였던 친구가 갑자기 불러세웠다. "야, 너 전자기기 좀 다룰 줄 알지?" "아니 그렇진 않은데" 사실이 그랬다. "TV랑 비디오 연결하는 거 정도는 하잖아." "응 뭐 그 정도는..." 그렇게 답한 게 화근이었다.

"1시간 뒤 후생관 2층에서 우리 대동제(대학 축제) 프로그램으로 일본 영화를 틀어주는데, 네가 가서 비디오 연결 좀 해줘. 지금 할 사람이 없어." "무슨 영화?" "그건 나도 몰라. 다른 사람이 준비했어."

얼떨결에 투입된 현장에서 TV와 비디오를 연결했다. 상영 시간이 되자 학생 10여명이 몰려와 앉았다. 전등을 끄고 비디오를 틀었다. 현장책임자(?)로서 화면이 잘 나오는지 확인할 겸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틀어놓고 보니 영화가 아닌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주인공이 '맥가이버'처럼 과학 지식을 이용해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중간부터 뭔가 이상했다. 배경이 사우나로 옮겨갔고, 주인공이 한증막에 갇혀있다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이 시작됐다. 문제는 주인공이 여성이었고, 사우나라는 설정상 옷을 벗은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여학생 2명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간 건 그때였다. 불안한 마음에 따라나갔지만 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여학생 가운데 한명이 그 장면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단과대 건물 복도에 대자보 한장이 붙었다. 낯익은 이름이 적혀있어 봤더니 내 이름이었다. 음란물을 상영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 단과대 학생회장과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내게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성폭력 가해자가 된 셈이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틀었지만, 그런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문제될 장면이 나왔다면 즉각 상영을 중단했어야 했다. 사과하는 게 당연했다.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학생회장과 공동 명의로 사과 대자보를 썼다.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여학생들이 소집한 청문회에도 참석해 거듭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지금까지도 뼈 아픈 기억으로 남은 사건이다. 당시 충격을 받았을 여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

'미투'(Me too)의 힘은 가해자 실명 공개에서 나온다. 실명 공개는 대개 가해자의 즉각적인 사과를 끌어낸다. 배우 한재영의 사례가 그런 경우다. 물론 피해자의 폭로가 사실이라는 전제에서다. 미투 운동이 사회 전체에 들불처럼 번진 건 올 1월부터다.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을 폭로한 게 시작이다. 그러나 사실 미투 운동은 대학가에서 이미 약 20년전부터 있어왔다.

당시 일부 대학에선 학생간 성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학생 자치규약에 따라 실명 대자보를 쓰게 돼 있었다. 이를 통해 가해자의 공개 사과를 받아내고 피해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성폭력상담센터에 신고하고 학생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만약 대자보에 가해자의 실명이 적시돼 있지 않다면 과연 가해자들이 즉각 사과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을까?

그러나 학교 밖 세상은 조금 다르다.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한 것만으로도 피해자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때문이다. 허위가 아닌 사실을 적시해도 처벌하는 곳은 우리나라 말곤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공개된 사실이 진실일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도 공익을 위한 경우엔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준이 모호해 폭로자를 보호하기엔 역부족이다.

물론 허위사실로 누군가를 모함하는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그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다스리면 된다. 만약 허위사실로 고소·고발까지 당했다면 무고죄로 맞서면 된다. 2015년 유엔 자유권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는 우리나라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권고했다. 이제 정부와 국회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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