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내려놓는 '섬김의 리더'…민중기 중앙법원장

[판사 사용설명서-민중기 서울중앙지방법원장]

김종훈 기자 2018.03.27 05:00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솔직히 그런 행사 하면 법원장 혼자만 좋은 거 아닙니까."

아랫사람의 뒷담화 같겠지만, 사실은 법원장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주인공은 민중기 서울중앙지법 원장(59·사법연수원 14기). 구성원들을 섬기며 솔선수범하는 '서번트 리더십'의 소유자다. 기수에 따른 서열문화가 강하고 권위적인 법원에선 보기드문 사례다. 

그의 스타일은 2016년 봄 서울동부지법 원장으로서 전직원 체육대회를 준비했을 때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체육대회를 토요일에 잡았다는 보고를 들은 민 원장은 "직원들이 그걸 원하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관례인 만큼 그대로 진행해도 문제 없다는 담당부서의 의견을 물리치고 민 원장은 전직원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결국 다수 의견에 따라 체육대회는 취소됐고 원하는 부서만 알아서 행사를 열게 됐다.

윗사람이 폼잡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해선 안 된다는 게 민 원장의 소신이다. '탈권위'와 '소통'이 바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이다.

◇궂은 일은 내가 먼저

민 원장은 법원에서 '솔선수범'의 대명사로 꼽힌다.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디든 손을 보탠다. 남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짐일수록 흔쾌히 짊어진다. 

2016년 가을의 일이다. 하반기 법관 인사로 서울동부지법 판사가 줄면서 민사단독 재판부에의 업무부담이 크게 늘었다. 그러자 법원장인 민 원장이 직접 민사 소액 재판을 맡겠다고 나섰다. 지금이야 원로법관제 시행으로 종종 있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었다. 궂은 일을 남에게 맡기는 대신 자신이 먼저 나서서 맡는 민 원장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 원장이 최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장을 맡아 민감한 사안인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를 지휘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 제도개선특별위원장으로서 사법개혁 논의를 이끈 것도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민 원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판사는 "누가봐도 부담이 되는 자리였던 만큼 민 원장이 남에게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맡은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민중기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사진=뉴스1

판사의 존재 이유는 '좋은 재판'

판사는 '좋은 재판'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민 원장의 신념이다. 그에게 좋은 재판이란 곧 '공정한 재판'이다. 

2014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사건 때였다. 당시 교육계에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문제를 잘못 출제했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평가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험생들이 소송을 제기하자 '상위권 학생들 대부분이 정답을 맞혔다'며 발뺌했다. 이후 거액을 들여 수험생들을 상대로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을 앞세웠다. 1심은 '명백히 틀린 선택지부터 지워나가면 평가원이 제시한 정답이 나온다'라는 논리로 평가원 측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교육계는 수긍하지 않았다.

2심 재판을 맡은 민 원장은 이 사건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문제 검토는 평가원의 역할과 의무이고 수험생들이 부담해 불이익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라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 판결을 받고서야 평가원은 실수를 인정하고 상고를 포기했다.

민 원장은 기존 판례에 얽매이지 말고 공정한 판결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재판장 근무 시절엔 사건 피해자들을 법원에서 구제해줄 방법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라고 배석판사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억울해 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야기를 경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고 한다. 

'민주적 법원' 위해 먼저 내려놓는 리더

좋은 재판의 전제조건은 좋은 법원이다. 민 원장이 생각하는 좋은 법원은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법원이다. 판사들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정의로운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민 원장이 사무분담을 일선 판사들 손에 맡긴 것은 이런 소신 때문이다. 판사 사무분담은 원래 법원장이 행사하는 인사권한 중 하나다. 사무를 배정받는 일선 판사들 입장에선 법원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수직관계에선 법관 독립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게 민 원장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민 원장은 지난해 서울동부지법 원장 재직 당시 판사회의에 먼저 사무분담 안건을 부쳤다. 서울중앙지법 원장으로 부임하고 나서는 판사들이 사무분담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기로 했다.

민 원장은 법원장을 보좌하는 기획법관 인사권도 판사들에게 맡겼다. 일선 판사들이 뽑은 사람을 곁에 둬야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해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한 판사는 "민 원장은 사법행정은 재판을 위한 것이지 재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테니스를 사랑하는 '코트 위의 신사'

부장판사 시절 민 원장은 배석판사들 사이에선 같이 근무하면 '복받았다'고 할 정도로 서로 모시고 싶은 재판장이었다고 한다. 배석판사가 부장판사의 식사를 챙기는 게 일반적인데, 민 원장은 그렇지 않았다. 후배들이 눈치보지 않고 식사할 수 있도록 자신은 따로 끼니를 챙겼다.

민 원장은 법원에서 소문난 테니스 실력자다. 법조인들이 참여하는 법조 테니스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젊은이들과 경기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경기 매너를 중시한다. '코트 위의 신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일주일에 2~3차례 코트에 나갈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서울중앙지법 원장이 되고 나선 과중한 업무 탓에 코트에 서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는 퇴직 후 조용하면서도 의미있는 삶을 꿈꾸고 있다. 복잡한 서울살이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귀농에 대한 구상과 가끔씩 하는 '멍 때리기'가 혼자만의 취미라고 한다.

[인간 민중기]
취미 : 테니스, 바둑, 등산
주량 : 소주 1병반
좋아하는 책: 역사 서적
자신 있는 요리: 오므라이스

[프로필]
△대전 출생 △대전고 졸업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4회·사법연수원 14기 △해군 법무관 △대전지법 판사 △인천지법 판사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지법 남부지원 부장판사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부산고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서울동부지방법원장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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