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향판의 부활'?…권역법관제, 세종대왕이 봤다면…

이보라 기자 2018.04.12 04:00

“만약 상피법(相避法)이 없었다면 (…) 중인 이하는 반드시 공정하지 못한 데 빠지기가 쉬우니 상피하는 법을 잘 참작하고 절충해 아뢰라.”(세종실록 47권, 1430년 2월23일)

가까운 사람이 많은 곳에 벼슬을 내리지 않고 지인과 관련된 송사를 막는 게 상피제다. 고려 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세종 때 와서 정립됐다. 공직자의 외부 유착을 통한 부정부패를 막고 권력기관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깨지는 일을 막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였다. 

공직자가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가까운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공무원 대부분이 몇년 주기로 보직을 순환하거나 근무 지역을 바꾸는 건 그래서다. 2003년 도입된 지역법관제도(향판제도)가 시행 11년 만에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지역법관제도는 원하는 판사에 한해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하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원래 판사들은 2~3년 단위로 지역을 옮겨 근무하게 돼 있다.

지역법관제도가 폐지된 계기는 ‘황제노역’ 논란이었다. 광주지법 재판부가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 벌금 254억원을 선고하면서 벌금을 대신할 노역에 일당 5억원을 쳐준 사건이다. 당시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가 지역법관이었다.

말썽 끝에 사라진 지역법관제도가 다른 이름으로 부활할 조짐을 보인다. 10일 일선 판사들의 협의체인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판사가 한 지역에 장기간 근무토록 하는 ‘권역법관제도’ 시행을 대법원에 건의하면서다. ‘향판의 부활’이란 비판에 법관대표회의는 ‘권역법관’은 ‘지역법관’과 다르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판사들이 잦은 인사 이동으로 전문성을 키우지 못한다는 불만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는 지역은 바꾸되 보직은 유지토록 해도 해결될 일이다. 상피법을 정립한 세종대왕이 판사들의 이런 건의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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