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누구냐면"…그가 입을 열자 '지옥문'이 열렸다

[그일, 그 후] 가해자가 피해자 신상 공개…그 후 시작된 '마녀재판'

박보희 기자 2018.04.25 04:00
그래픽=이지혜 기자

"헤어지자고 말하자, 목을 조르고 눕혔어요. 전에도 때린 적이 있어서 흥분시키면 안될 것 같아서 일단 누워있다가, 자는 줄 알고 몰래 나왔는데 쫓아와서 결국 다시 끌려들어갔어요. 그리고 소주를 한 병쯤 먹더니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제 손을 잡고 자기 얼굴을 때리게도 했어요. '신고를 해도 쌍방폭행이 될 것'이라면서. 그리고 칼을 가져와서 제 손에 쥐어주려고 했어요. 자기를 찌르라면서요. 주먹을 쥐고 안 폈더니 강제로 눕혀놓고 손가락을 펴서 칼을 쥐어주려고 하더라고요. 무서워서 신고 안할테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했는데, 결국 자기가 자기 허벅지를 찔렀어요. 그리고 '경찰에 네가 찌른 거라고 말하겠다'고 했어요."

A씨는 그 날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전쟁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이 되어서야 A씨는 가까스로 그의 집을 탈출해나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했다. 숨기고 넘어가면 없던 일이 될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보고나서야 없던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터넷에서 여성단체를 찾아 연락을 해봤지만, 성폭력 범죄가 아니라서 도울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신고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니 꼭 신고하라"는 상담원의 말을 듣고 신고를 결심했다.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서는 진단서가 필요했다. 그날 오후 병원에 가서야 손가락이 부러진 것을 알았다. A씨는 "강제로 칼을 쥐여주려고 손을 붙잡고 몸싸움을 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전치 5주 진단을 받고, 경찰에 신고했다. 여기까지가 A씨가 말하는 2016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폭행 신고 그 후…가해자와 언론이 공개한 피해자 신상

그리고 지난해 3월14일 검찰은 그를 폭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더 끔찍한 일은 그 다음 벌어졌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래퍼가 그의 여자친구를 폭행해 재판에 넘겨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언론을 통해 A씨의 신상을 공개했다. 그리곤 "A씨는 가학적 성관념을 가진 마조히스트"라며 "때려달라고 해서 때려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가 공개된 후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은 '폭행'이 아닌 A씨의 성적 취향에 맞춰졌다. '마녀재판'이 시작됐다. A씨의 신상은 '탈탈' 털렸고, A씨가 개인 SNS(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사진들은 A씨가 '마조히스트'라는 주장의 근거처럼 포장돼 인터넷 게시판을 떠돌아다녔다. 관련 기사와 블로그, SNS 등에는 '좋아서 해놓고 뭐가 문제나'는 식의 모욕적인 악플이 수천개씩 달렸다. 심지어 '맞는 것 좋아하면 나랑도 하자'며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가장 걱정했던 건 기사가 나오고, 신상이 공개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신고를 망설였던건데, 가해자가 아예 대놓고 언론에 제가 누구인지 말했고, 언론은 그대로 기사를 냈어요. 전 제가 누구인지 공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강제로 공개당한 거에요. 맞은 것도 끔찍했지만,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이 더 끔찍했어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상이 공개된 A씨는 '원래 저런 애'가 돼 '가십거리'로 소비됐다. "이런 식의 해명을 해야하는 것 자체도 어이없지만, 전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싫어해요. 전 헤어지자고 말해서 맞았어요.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가 뼈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무너진 일상·사라진 꿈…"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A씨의 일상은 무너졌다. 또 어떤 악플이 달렸을지, 또 어떤 글이 올라왔을지를 생각하면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일을 계속 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알아볼까봐 집 밖에 나오는 일조차 힘들었다.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봐 제일 무섭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렇다고 제가 연락해서 아니라고 구구절절 해명을 할 수도 없잖아요."

벌써 1년이 지난 일이다. 악플을 달고 성희롱 메시지를 보냈던 사람들에게 이 일은 이미 잊혀진 일일 가능성이 높지만, A씨에게 이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 일을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1년 전에 이 분이 제 사진을 유포하면서 '얘 사진 봐라 사이즈 나온다' '원래 이런 것 좋아하는 애'라는 식으로 글을 썼거든요. 당시 제가 '나에 대해 이런 식의 글 쓰지 말아달라'고 항의해서 사과까지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분은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연락을 한 거죠.

전 제가 괜찮아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연락을 받고 나니 너무 힘든거에요. 이 사람은 제가 기억을 하니까 화라도 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제가 알지도 못하잖아요. 악플을 달고 뒤에서 절 욕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가릴 수도 없어요. 제가 누군가를 만나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사람이 절 손가락질하고 모욕했던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제게 '한 번 하자'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일 수도 있어요. 제가 가학적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식의 기사까지 났으니, 전 앞으로 더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해요. 실제 SNS 메시지로 모욕적인 성희롱 메시지도 많이 받았고요. 더이상 사람을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자신의 꿈도 접었다. 조금씩 일이 늘어나던 중이었지만, 그 일 이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처럼 다시 일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제가 그만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 생각과는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없게 된 거잖아요. 지금도 항상 생각해요.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항소 8개월째…아직 한 번도 안 열린 재판

이 모든 일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 일어났다. 그리고 4개월 뒤, 1심 법원은 A씨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다. 법정에서도 그는 "(A씨가) 가학적인 성관계를 요구해서 때린 것"이라며 "A씨가 칼을 잡아 제압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했으니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앞서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말, 그리고 A씨가 그에게 맞으면서 들었다는 말과 같다.

법원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해 7월 법원은 그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목격자의 진술, CCTV 기록, 카카오톡 등 증거를 살펴본 결과 "피해자가 때려달는 요구를 했다고 보기 힘들다. 피해자에게 칼을 쥐어주려고 했던 사실이 인정될 뿐 피해자가 피고인을 해하기 위해 칼을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는 항소했다. "형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요. 감금 당하고 칼로 위협을 당했고, 전치 5주, 실제로는 석달 넘게 치료받을 만큼 맞았는데, 이 정도 폭행은 별일 아닌 건가요."

집행유예를 받은 그 역시 항소했다. 하지만 항소 후 9개월 째 재판은 열리지 않고 있다. 심지어 상대방에겐 항소장조차 전달이 안됐다. 법원은 지난해 8월 그에게 항소장을 보냈지만 '폐문부재'로 전달하지 못했다. 집에 사람이 없거나 주소가 잘못돼 전달이 안됐다는 뜻이다.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이 집에 없거나 주소가 잘못돼 항소장 전달이 안됐을 경우 통상 검사가 주소를 확인하고 소재지를 파악해 다음 절차를 진행한다. 하지만 항소 이후 8개월 동안 우편으로 한 차례 항소장을 보낸 것 말고는 나아간 게 없다.

그러다 지난 3월, 항소 8개월만에 재판부가 바뀌고 나서야 법원은 그에게 두 번째 항소장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이유로 그에게 항소장은 전달되지 않았다. 항소 후 그는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은 상태다. 재판이 멈춰있는 사이, 그의 SNS에는 그와 지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A씨는 여전히 재판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전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가해자는 잘 살고 있다더라고요. 전 아직 사과도 못받았어요. 사건 직후 사과문을 SNS에 올렸는데 제가 아닌 자신의 팬들에게 사과를 하더라고요. 누구에게 뭐가 미안한걸까요? 그냥 재판이라도 빨리 시작돼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머니투데이 '더엘'(The L)은 해당 남성에게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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