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당신 남편이라면 당장…"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막말에 유머로 응수한 처칠…스스로 '품위' 포기하는 정치인의 욕설

이상배 기자 2018.05.10 05:00

2015년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은 20세기초 영국에서 벌어진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렸다. 1928년까지 영국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보수 정치인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도 그 중 한명이었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게 처칠은 '공공의 적'이었다.

처칠이 정치인들의 한 디너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이었던 낸시 에스터 여사가 처칠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라면 서슴지 않고 당신이 마실 커피에 독을 타겠어요." 한마디로 죽이고 싶다는 얘기다. 욕은 안 했지만 이쯤되면 막말이다.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처칠은 유머로 응수했다. "내가 만약 당신의 남편이라면 서슴지 않고 그 커피를 마시겠소." 둘다 막말이지만 적어도 품위는 잃지 않았다.

영국 의회는 논쟁이 격렬하기로 유명하다. 여야가 양쪽 녹색의자에 마주앉아 상대방이 발언할 때 야유를 쏟아내는 영국 하원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때론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욕설을 하는 일은 없다. 욕설은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할 때에도 반드시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는 표현을 붙인다는 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규칙이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가 재임시절 야당 의원의 공격을 받아치며 쓴 표현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존경하는 OOO 의원님, 의원님께서 제가 낸 세금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게 영국 정치 역사상 가장 모욕적이라고 손 꼽히는 발언의 수위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국회의원들끼리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흥분하지 않았을 때 얘기다. 일단 감정싸움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발언하는 상대편 의원에게 "그게 무슨 X소리야" "내려와 임마"라고 외치는 건 더 이상 기삿거리도 안 된다. 국정감사에선 "한국말 몰라?"와 같은 표현도 예사로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했다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59·대구 달서구병)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여당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면서다. 당초 이 사건이 논란이 된 건 명예훼손이 아닌 '모욕' 때문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튿날인 지난달 28일 서울역광장 집회에서 조 대표는 "핵 폐기 한마디도 얘기 안 하고 200조를 약속하는 이런 미친 XX가 어딨느냐"며 "이 인간이 정신이 없는 인간 아닌가. 미친 X아닌가"라고 했다.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진 않았지만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우리 측 당사자인 문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발언이다.

조 대표가 욕설을 한 대상이 문 대통령이 맞다면 국가원수를 모욕한 셈이다.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한 발언인 만큼 '공연성'이라는 요건도 만족한다. 그러나 조 대표가 모욕죄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 현행법상 모욕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다. 문 대통령이 조 대표를 모욕죄로 직접 고소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결국 남은 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조 대표의 발언이 허위이고, 그가 허위인 줄 알면서도 발언했음을 검찰이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러려면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있었던 발언 전부를 검찰이 모두 확인해야 한다. 

조 대표가 처벌을 피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에서까지 자유로운 건 아니다. 비단 그의 문제 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인에게 재치있는 촌철살인까진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적 비판을 하더라도 최소한 품위는 잃지 않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정치인의 욕설에 또 한번 씁쓸한 '가정의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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