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 어렵다구요? 그럼 김앤장으로 갈게요"

황국상 기자 2018.05.23 17:40
서울 서초구 현대차그룹 본사 전경 / 사진제공=뉴스1

"한 대기업에서 세금 소송 때문에 찾아왔다. 내용을 보고 승소하기 어렵겠다고 했더니 '그럼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맡겨야겠다'고 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이기기 어렵다면서요? 그럼 제일 큰 곳에 맡겨야 지더라도 회사에서 욕을 덜 먹죠'라고 하더라."(모 법무법인 대표변호사)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무기한 연기됐다. 개편안의 핵심인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분할합병이 시장의 반발로 좌초되면서다. 국내 1위 로펌 김앤장과 1위 회계법인 삼일PWC가 마련한 방안이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일류 로펌 또는 회계법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불러온 참사라는 지적이다.

통상 10대 그룹 규모의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법률 자문료는 적게는 수십억원, 많게는 수백억원에 달한다. 국내 한 대형로펌 자문그룹의 A변호사는 "국내 10위권 모 그룹의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자문을 해준 로펌은 자문료로 약 150억원을 받은 것으로 안다"며 "대개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한 자문료는 중견기업이라도 최소 20억~30억원에 달하는데, 현대차그룹 정도의 규모라면 자문료가 이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배구조나 의결권 문제의 경우 오너 일가로선 경영권이 달려있다 보니 높은 수임료도 기꺼이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 한 증권사 임원은 "10여년 전 한 중견 제약사의 경영권 분쟁에서 의결권 행사가 제한된 자사주를 유동화시켜 의결권을 되살려주는 거래가 이뤄진 적이 있다"며 "당시 거래에 참여했던 로펌과 회계법인, 증권사 등이 받은 수수료가 총 100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높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높은 자문료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실패한 데에는 시장의 반발이라는 변수를 간과한 김앤장과 삼일의 책임이 없지 않다.

비단 로펌이나 회계법인 뿐이 아니다. 전세계 1위 컨설팅업체인 맥킨지에 천문학적인 자문료를 지불하고 휴대폰 사업에 대한 컨설팅을 받았던 LG그룹은 "스마트폰에 집중하지 말라"는 컨설팅 결과를 받아들였다가 초창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문제는 기업들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알고도 비싼 돈을 요구하는 1위 업체를 찾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 대기업의 법무실 관계자는 "신사업을 추진할 때 정부 규제에 대응해 '면피용' 보고서를 준비해야 할 때가 있다"며 "정부가 신사업 승인 여부를 검토할 때 1위 로펌 김앤장이나 1위 회계법인 삼일 등의 의견서가 첨부돼 있으면 '이 회사가 나름 법적 검토를 했다'고 보고 호의적으로 봐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자문료로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썼다고 성공이나 승소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럼에도 기업의 실무자들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불확실성을 줄이고 책임 문제를 피하기 위해 1위 업체를 쓸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거나 패소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김앤장과 삼일에 맡겼는데도 안 됐다'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관행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평가다. 이완근 한국사내변호사회 회장은 "사내변호사를 비롯해 기업 내부에 법률 또는 회계 전문가들이 늘어나면서 과거처럼 면피를 위해 대형 로펌이나 회계법인만을 기계적으로 선임하는 경향은 줄어들고 있다"며 "규모가 큰 사건일수록 우리 회사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사건의 진행단계마다 꼼꼼하게 소통해주는 로펌이나 회계법인을 선호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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