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조사 후 작성한 피의자 메모, '무죄' 결정적 근거"

[the L 인물포커스] 자기변호노트 원조 日 '피의자 노트' 제안한 아키타 마사시 변호사 인터뷰

백인성 (변호사) 기자 2018.06.24 11:03
아키타 마사시 변호사 /사진=백인성 기자,

"피의자 노트는 '피의자의 눈으로 본 조사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피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 의지를 다지고 힘을 내는 수단이 됩니다. 강압수사를 당할 경우 피의자 노트를 적으면서 스스로 '이건 정말 심한 일이었구나'하고 자신의 사건을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강압으로 허위 자백할 경우 그 자백의 신빙성과 임의성을 뒤집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의 형사사건 피의자는 고초를 겪기로 유명하다. 일단 체포될 경우 대부분 구속까지 이어지고, 최장 23일간 구금된 채 수사기관에서 '매일' 4~10시간 가량 강도 높은 피의자 조사를 받는다. 변호사 입회는 금지된다. 그러다 보니 부당한 강압조사를 받지 않도록 형사사건 피의자가 조사 내용, 조사시 수사관의 발언 등 수사 과정을 신문 후 직접 메모하는 '피의자 노트' 제도가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를 중심으로 정착돼 있다. 긴급 변호를 요청하는 경우 출동하는 각 지역변호사회 당직 변호사들은 반드시 휴대하는 자료다.

올해 4월부터는 우리나라 서울 서초·광진·용산·은평·서부경찰서와 인천해양경찰서의 유치장·형사당직실에 '자기변호노트'가 비치됐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피의자 노트 제도를 본딴 제도를 시작하면서다. 머니투데이 '더엘'(the L)이 피의자 노트 제도를 첫 제안한 아키타 마사시 변호사(秋田まさし·55)를 20일 만났다.

◇"피의자노트 도입 후 日국민 권리의식 높아져"

아키타 변호사가 처음 '피의자 노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1995년 살인사건 변호를 맡으면서였다. "1987년 발생한 살인사건의 공판기일이 8년만에 열렸습니다. 당시 조사관을 상대로 피의자 신문조서의 임의성과 신빙성을 공격하는 반대신문을 했는데, 조사관이 8년 전 조사 과정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이를 기억하냐고 묻자 '조사일지'를 보고 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수사기관에선 이런 일지를 적는데, 피의자도 조사 과정을 문서로 기록하면 방어권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생각을 구체화해 2003년 오사카에서 열린 일변련 심포지엄에서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일변련은 2004년부터 피의자노트를 정식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매년 예산을 배정해 전국 지방변호사회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노트는 △인신구속과 형사소송절차의 흐름 △수사에 임하는 마음가짐 △피의자 노트 작성시 장점 △작성 방법 △위법한 수사에 대한 대응법 △피의자 노트 본문(23일치) 등 70여페이지로 구성됐다.

아키타 변호사는 노트 도입 이후 '피의자 방어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이 민보다 올바르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죠. 묵비권 행사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99년 사법개혁, 2004년 노트 도입 이후 피의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경우가 점점 밝혀지고 방어권 행사가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日 '피의자 노트' 한국어판본.//사진=백인성 기자,

◇'피의자노트 폐기' 근거로 무죄 선고도

피의자노트는 이미 일본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2016년 일본 마쓰에 지방법원이 노인에게서 현금을 가로채 사기 혐의의 공범으로 기소된 남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게 대표적이다. 이 남성은 수사 단계에서 2015년 지인의 부탁으로 피해자로부터 1550만엔을 수령했다고 자백했지만 재판정에서는 "피의자 신문에서 혐의를 부인하면 판사에게 나쁜 심증을 줄 수 있다는 경찰관 얘기를 듣고 허위 자백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를 적은 피해자노트를 구치소 직원이 폐기한 정황이 드러났고, 검찰은 자백이 적힌 신문조서를 철회하면서 무죄가 선고됐다. 피의자노트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에까지 등장한다.

피의자노트는 피의자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잡는 역할도 한다. 아키타 변호사는 "상호 동의하에 이뤄진 성행위와 관련해 성폭행 혐의로 고발당한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경찰관이 '네 입으로 네가 다 말하면 되지 않느냐. 말 안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말 안하면 불리하다. 계속 묵비권 행사할 경우 재판의 심증이 틀림없이 나빠질 것이다'며 회유를 거듭했다"며 "피의자는 노트를 통해 매일 마음을 다잡았고, 결국 끝까지 자백 내용이 적힌 피의자 신문조서에 기명날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피의자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한국에서도 국내 자기변호노트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유했다. 최근 경찰의 1차 수사권을 보장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발표됨에 따라 앞으로 경찰 단계 피의자신문이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메모는 자기 자신이 버틸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자기를 스스로 변호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수사관의 의도에 따라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죄를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꼭 사용해서 자기 권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아키타 마사시 변호사 프로필]
△1986년 사법시험 합격 △1987년 도쿄대 법학부 졸 △오사카변호사회 형사변호위원장 △일본변호사연합회 조사가시화실현본부 부본부장 △일본변호사연합회 국선변호본부위원·국제변호입법대책위원·형사변호센터 사무국장 △일본최고재판소 형사규칙제정자문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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