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청바지 입은 여성, 주체적인 여성

이보라 기자 2018.07.05 05:15
#1. "피해 여성이 청바지를 입었다고 성폭행이 인정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건데…" 1990년대초 성폭력 가해자의 변호인을 맡았던 한 변호사의 말이다. 

당시 서울지법의 한 재판부는 "여성이 반항하는 상황에서 찢어지지 않는 청바지를 내리고 성폭행하는 것은 어렵다"며 가해자에 면죄부를 줬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당시 가해자의 변호인 입장에서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2. "피해 여성은 아동이나 장애인이 아니고 혼인 경험이 있는 학벌 좋은 여성입니다. 공무원 지위를 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무보수 자원봉사 자리로 옮겨온 주체적이고 결단력 좋은 여성이죠. 이런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제한되는 상황에 있었다고 보는 건 맞지 않습니다." 2일 서울서부지법 재판정에서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53)의 변호인이 한 말이다.

20여년이란 간극이 있음에도 성폭력을 다루는 법정의 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성폭행을 규정하는 형법 규정이 바뀌지 않은 탓이다. 현행 형법상 강간, 즉 성폭행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경우에만 성립한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면 아무리 원치 않은 성관계라도 법적으론 성폭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보는 선진국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죄목이 '위력에 의한 간음'이다. 바로 안 지사에게 적용된 혐의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가해자의 사회·경제·정치적 지위가 있으면 인정된다. 그러나 성인이 피해자일 경우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가 인정되는 사례는 드물다. 

한국 사회는 '미투'(나도 고발한다·me too)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한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미투운동'의 파급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제자리다. 재판정 안팎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를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공유하기

1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