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조 마다 않겠다"던 대법원, 檢 수사 시작되자…

[the L 레터] 자료 제출부터 '삐걱'…대법원 사사건건 '거부'에 수사 장기화

한정수 기자 2018.07.10 04:00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이기범 기자

"이미 이뤄진 고발에 따라 수사가 진행될 경우 미공개 문건을 포함해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모든 인적·물적 조사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할 것이며 사법행정의 영역에서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달 15일 공식 입장문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벌어진 법관사찰과 재판거래 등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특조단의 보고서 발표에도 조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김 대법원장은 결단을 내렸다. 당초 고발이나 수사의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법원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수사 협조'라는 타협안을 꺼내들었다.

검찰은 즉각 움직였다. 시민단체 등에서 양 전 원장을 비롯한 핵심 관계자들을 고발한 사건을 모두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에서 '최정예 칼잡이부대'인 특수1부(부장검사 신자용)로 재배당하며 강도 높은 수사를 예고했다. 

1개월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검찰 수사는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통상의 사건이었다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자료 분석이 끝나고 소환 조사가 한창일 때다. 그런데 검찰은 아직도 수사에 필요한 자료들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대법원이 자료제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탓이다.

검찰은 지난달 19일 양 전 원장 등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실물과 관계자들의 업무용 메신저·이메일 자료, 업무추진비 및 관용차 사용 내역 등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특조단이 자체조사 때 확보한 문건 410개만 제출했다. 그것도 검찰의 요청이 있은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게다가 양 전 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하드디스크 파일은 물리적으로 삭제됐고, 다른 관계자들의 하드디스크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의 문제로 줄 수 없다고 했다. 

검찰은 대법원과 협의를 이어간 끝에 지난 6일 오후부터 직접 대법원을 방문해 사건 관계자들의 하드디스크 속 파일들을 복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대법원 내에 마련된 장소에서 이뤄지고 있다. 복사하는 과정을 행정처 사람들이 일일이 지켜보고, 수사에 필요한 파일과 그렇지 않은 파일을 가려내고 있다고 한다. 검찰이 파일을 검토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요청한 자료를 다 주는 것도 아니다. 대법원은 고영한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의 하드디스크 속 파일과 업무용 메신저 및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 등은 제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이 일부 자료의 제출하면서 든 논리는 개인정보보호법이다. 법을 다루는 대법원이 컴퓨터나 업무용 메신저 등을 실제 사용한 사람의 동의 없이 수사기관에 마음대로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이런 주장에 한 법조계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어떤 자료에 대한 임의제출을 요구했을 때 당사자가 그 제출이 위법한지 여부는 따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사건 관계자들의 하드디스크가 국가의 공용물품인 만큼 통째로 제출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대법원이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당사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받으면 될 일이다. 

사실 검찰 입장에서는 압수수색을 시도하면 될 일이었다. 통상의 수사였다면 이미 영장을 발부받아 자료를 수거해갔을 터다. 그러나 검찰은 대법원의 체면을 살려주는 쪽을 택했다. 대법원장이 협조를 약속했는데 대법원을 상대로 역사상 유례없는 압수수색을 단행하기에는 검찰도 부담이 큰 탓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보면 검찰이 언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법원이 거듭된 자료제출 거부애 명분은 쌓일 만큼 쌓인 터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이 주는 것만 가지고 수사한다는 것은 절대 안 될 말"이라며 압수수색 가능성을 시사했다. 

대법원의 비협조에 수사 기간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열흘이 뭐야, 더 걸리죠. 우리 사무실을 새로 차린 셈이잖아요. 그냥 이미징(복사)만 해와서 분석하면 되는데…지금 그게 아니에요. 우리도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임의제출 방식으로 협조를 받는 거니까 최대한 받아봐야지" 검찰 관계자의 말이다. 

사법농단 의혹이 처음 불거진 건 지난해 초다. 발단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했다는 '블랙리스트' 의혹이었다. 이후 세차례에 걸쳐 대법원 차원의 자체 조사가 진행됐지만 의혹은 불식되지 않았다. 대법원이 자신들의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설치에 도움을 받기 위해 박근혜정부 청와대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했다는 재판거래 의혹까지 불거졌다. 1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으면서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최근 일선 판사들 사이에선 김 대법원장과 그 측근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미 예상됐던 고강도 검찰 수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지적부터, 김 대법원장이 연일 '악수'를 두며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그를 잘못 보좌하는 사람들 탓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어떻게 하면 떨어진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사분오열하는 모양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법원은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정의의 보루다. 불신의 고리를 끊고 신뢰받는 법원으로 거듭날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시작이 검찰 수사다. 법원의 자체 조사로는 안 된다는 건 이미 경험을 통해 확인됐다. 이미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아프더라도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용기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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