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주의 PPL] 증거 없이 '유죄' 선고하는 판사들

유동주 기자 2018.09.12 05:00
남편의 성추행 혐의 실형 선고가 억울하다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 캡쳐

곰탕집에서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남성의 부인이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 25만명 이상이 참여하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증거없이 피해자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유죄를 선고하고 법정구속하는 게 사법 원칙에 맞는지를 놓고서다.

논란이 된 이 사건의 1심 판사는 "피해를 당한 내용과 피고인의 언동, 그리고 범행 후의 과정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고 자연스럽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른 판단이다. 성범죄 사건에서 별다른 증거가 없을 때, 특히 하급심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피해자 중심주의' 판결

지난 4월 대법원은 '성희롱' 혐의로 해임된 어느 교수가 불복하고 제기한 소송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판결문에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이는 곧 '피해자 중심주의'를 대법원이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해석됐다.

대법원은 판결문에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살필 때는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 문화와 인식·구조로 인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부정적 반응이나 불이익한 처우 등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성희롱' 여부를 직접 다투는 사건이 아니라 해임의 적절함을 판단하는 사건이었지만,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여성단체와 언론에 의해 높게 평가됐다.  
그러나 이전에도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에만 의존한 판결은 종종 있어왔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사견임을 전제로 "성폭력 사건에서 무죄가 나오면 여성단체가 가하는 압력이 상당해 이에 굴복하는 판사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털어놨다.

왼쪽부터 이진욱, 이민기, 박유천/사진=뉴스1

◇잇따른 男연예인들 성폭행 무고사건

최근 몇년새 유명 남성 연예인들이 성폭행(강간) 가해자로 몰렸다가 무혐의로 종결된 사건이 잇따랐다. 박시후, 이민기, 박유천, 이진욱 등이다. 일각에선 법원의 '피해자 중심주의' 경향이 이 같은 무고 사건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위 '꽃뱀' 사건을 많이 다뤄 본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피해자와 가해자 진술이 상반된 경우 일단 여성 피해자를 약자로 단정하고 진술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어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에게 불리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사기관이 고소를 당한 사람에게 강간죄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구속수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 구속된 상태에서 남성이 무죄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며 "실제로는 합의금을 주고 끝내는 경우가 많아 드러나지 않는 꽃뱀사건이 허다하다"고 했다. 

◇진술만 일관되면 증거 없어도 '유죄'?

몇년 전 어느 지방법원에서 성범죄로 1심에서 유죄로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입증받은 두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다. 평범한 회사원, 대학생 남성이 억울한 무고 피해자임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 중 대학생이 가해자로 몰린 사건에선 성추행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중학교 여학생이 '구체적이고 일관된' 거짓말로 검찰·법원을 속였다. 1심 판사는 15세 여학생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됨'을 이유로 다른 증거가 없는 데도 유죄로 인정했다. 어린 학생의 서툰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던 대학생은 유죄 선고에 충격을 받고 2심에선 변호사를 선임해 적극 대응했다.

진실은 이렇다. 과외선생이던 대학생에게 보험을 권해 가입시켰던 여중생의 어머니가 보험이 해약되자 앙심을 품었다. 결국 15세 딸에게 거짓진술을 시키고 허위 고소를 한 사건이었다. 무죄임이 입증됐지만 대학생은 학교에 성추행범으로 소문나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다른 사건은 회사원이 회식 뒤 동료 여직원의 집에서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다가 여직원의 애인에게 들키면서 '성폭행범'으로 몰렸던 사건이다. 여성은 애인의 추궁 탓에 엉겁결에 '강간'임을 주장했고 남성은 구속당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과거에도 여러 차례 같은 장소에서 성관계가 있었음이 입증되면서 뒤늦게 '화간'으로 결론나 남성은 풀려났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의자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의심스러울 때는 피의자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있다. 10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이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취지다. 

이경재 변호사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는 게 원칙이다. 증거상 확실한 범인인지 불분명하다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라며 "백번 피해자의 말이 맞다고 해도 다른 증거들에서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면 법에서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판사가 1심에 법정구속을 했는데 2심에서 무죄가 나오면 그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며 "재판의 기본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다. 판사 기분대로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런 무죄추정의 원칙이 유독 성폭력사건에선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범죄 특성상 증거나 증인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사법 원칙이 완전히 무시돼도 되는 건 아니다.

언론도 책임이 있다. 연예인 성폭행 사건 보도에서 피해자·가해자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이진욱을 '가해자'로 묘사했고 고소여성을 '피해자'로 불렀다. 굳이 쓴다면 '가해 혐의자' 또는 '가해자로 지목된 ○○○' 정도의 표현을 써야 한다. 훗날 밝혀진대로 사실은 이진욱이 '피해자'였고, 고소여성은 무고죄의 '가해자'였다. 

1960년에 출간돼 퓰리처상을 수상한 하퍼 리의 동명 소설을 극작가 호턴 풋이 각색한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한 장면/ 출처=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앵무새 죽이기'의 억울한 사법 피해자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믿어 손쉽게 유죄로 판단하란 게 아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피의자·피고인의 주장은 무조건 배척하라는 것도 아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모티브가 된 1931년 '스코츠버러 사건'은 피해 주장 여성의 말을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백인 여성 2명이 화물열차에서 흑인 소년 9명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거짓말하면서 흑인 소년 8명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건이다. 

백인 여성 2명은 자신들의 성매매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옆에 있던 흑인 소년들을 고소했다. 9명 가운데 5명은 1937년 성폭행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은 1976년에야 사면됐고 나머지 3명은 그들이 죽고 난 뒤에야 82년만에 사면을 받았다. 

유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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