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물건 고쳐서 파는 게 불법이라고?"

[우리 삶을 바꾼 판사] 권오창 김앤장 변호사, 판사 시절 '중고 재활용 합법 인정' 대법원 판례 이끌어내

송민경 (변호사) 기자 2018.09.20 04:01

권오창 김앤장 변호사(전 판사)

폐차된 차량의 범퍼가 찌그러져 있을 때, 조금만 수리하면 쓸 수 있어도 그냥 버려야 할까? 1999년까진 그랬다. 당시엔 중고품을 수리해 되파는 것은 불법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 견해였다. 제조사의 디자인권을 침해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대법원이 새로운 판례를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대법원은 폐차장에서 자동차 범퍼를 수집해 고쳐 판매하는 행위는 자동차 제조사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99도2079 판결) 중고품 수리·보수의 허용 범위를 명확히 한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시작은 1심 판결이었다. 1심의 결론이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인정됐다. 이때 1심 판결을 통해 대법원의 새로운 판례를 이끌어낸 주인공이 바로 당시 제주지법 형사단독 판사로 있던 권오창 김앤장 변호사(53·사법연수원 18기)였다. 


사연은 이렇다. 박모씨는 제주도에서 자동차 범퍼 재생업체를 운영하며 1997년 4월부터 1998년 7월까지 폐차장 등지에서 수집한 각종 화물차량의 범퍼를 절단, 도색 등 수리한 뒤 자동차정비업소 등에 팔았다.

이를 알게 된 현대·기아·대우자동차는 "해당 범퍼들은 의장(디자인) 등록이 돼 있는 만큼 정당한 권한 없이 의장권을 침해한 것은 불법"이라며 1998년 9월 박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의장법(현재의 디자인보호법) 위반 혐의로 박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판사로서 이 사건을 받아든 권 변호사는 몇 년 전 중고가구 업체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만약 이 사건이 유죄라면 중고가구 업체도 똑같이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금만 고치면 쓸 수 있는 걸 버리는 건 낭비 아닌가? 환경에도 나쁘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일주일에 50건씩 판결문을 쓰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터였다. 새로운 판례를 만들려면 나름의 논리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오랜기간 밤 새워 공부를 해야 했다.


현실과 양심 사이에서 그는 양심을 택했다. 퇴근도 포기하고 제품의 수명 등에 대한 책과 논문을 보며 연구를 거듭했다. 권 변호사는 "선고 전날부터 판사실에서 꼬박 밤을 새며 판결문을 썼다"며 "다 쓰고나니 아침이 돼 법원 직원들이 출근하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1999년 1월,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범퍼 재생행위는 사용기간이 남아 있는 범퍼를 수집해 수리한 것에 불과하고 새로운 범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중략) 내용기간 내에 있는 자동차부품을 재생해 사용하는 것은 자원의 절약, 폐기물의 발생억제, 재활용의 촉진 등 공공의 이익에도 부합한다"(제주지법 98고단1351 판결)


검사는 항소했지만 2심의 결론도 같았고, 대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중고품 재활용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 판결은 영세업자가 국내 대형 자동차 업체들과의 소송에서 승리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권 변호사는 2004년 법원을 떠나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2014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뒤 다시 김앤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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