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제사 못지낸대요"…본처 '딸'보다 내연녀 '아들'이라는 법원

박보희 기자 2018.09.23 09:00
사진=뉴스1

정미씨(가명)는 시동생에게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의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상주 자리에는 남편의 내연녀인 진경씨(가명)와, 그녀와 남편 사이에서 낳은 11살짜리 아들이 서 있었다. 남편은 진경씨 집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남편의 법적 아내는 정미씨였지만, 장례식장에서 정미씨는 고인에 대한 애도만 드리고 돌아서야 했다. 장례식장에서 그 자리는 내 자리라고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이후 진경씨는 남편을 추모공원에 봉안했다고 했다. 

정미씨가 추모공원에 찾아갔을 때 남편의 납골함에는 진경씨와 진경씨 아들과 남편의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정미씨와 두 딸의 사진을 둘 곳은 없었다. 

정미씨와 두 딸은 '남편과 아버지를 추모할 권리'를 갖고 싶었다. 정미씨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랜기간 두 집 살림을 해 온 남편이지만, 법적 남편이었고 두 딸의 아빠였다. 딸들은 정당하게 아빠를 추모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정미씨와 두 딸은 진경씨를 상대로 "남편의 유해를 돌려달라"며 유해인도 청구 소송을 냈다. 

정미씨 측은 "공동 상속인들이 누가 제사주재자가 되는지 합의하지 못했다면 자녀들 중 연장자가 제사주재자로 지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 상속인들이 서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다투는 상황이라면, 망인 즉 남편의 가장 큰 자녀가 제사를 맡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얘기다.

반면 진경씨 측은 "아들이 제사주재가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며 "청구를 받아줄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1·2심 법원은 남편의 법적 배우자인 정미씨가 아닌 진경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남편과 정미씨 사이에는 '딸'만 있지만, 남편과 진경씨 사이에는 '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법원은 "적서(嫡庶)를 불문하고 장남이나 장손자가, 공동상속인들 중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장녀가 제사주재자(제사를 지낼 권리가 있는 사람)가 된다"고 했다. 법원의 판단은 '아들'이었다. 

법원은 "사회가 변하고 있어 적장자가 우선적으로 제사를 승계해야 한다는 관습은 상속인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고 적서간 차별을 두는 것"이라며 "누가 제사주재자가 되는지 규정이 없고, 다만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일정한 기준을 적용해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해진 것은 없고 상속인들이 협의해 정할 일이라는 취지다.

법원은 이어 "제사는 부계혈족 중심의 가계 승계에 바탕을 두고 있어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장남이나 장손자가 제사주재자가 되고,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주재자가 된다는 인식이 널리 용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같은 조건과 지위에 있다면 연장자를 우선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이라고 판단했다.

아들이 우선이고, 아들이 없을 경우에야 딸이 제사를 맡을 수 있는데, 같은 조건이라면 나이가 많은 순으로 순서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이 바뀌어' 법적 배우자의 자녀만 제사를 맡도록 하는 것은 차별에 해당해 문제가 있지만, 나이많은 딸보다는 어리더라도 아들이, 남자인 손자가 있다면 딸보다도 손자가 제사를 맡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인 셈이다. 

법원은 '장남이나 장손자가 우선적으로 제사주재자가 되는 것은 다른 구성원에 대한 차별이다'는 주장에 대해 "이런 차별은 조상숭배와 제사봉행이라는 전통 보존과 제사용 재산 승계에 대한 법률관계를 간명하기 위한 것으로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정미씨와 딸 모두가 제사주재자가 되게 해 달라'는 요청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서에 맞지 않고, 제사주재자를 공동으로 정하는 것보다 특정한 1인으로 정하는 것이 사회통념상 적절하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법원은 '가족 간 다수결로 정하자'는 정미씨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통과 윤리를 담고 있는 제사와 제사주재자의 결정을 다수결로 정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와 함께 정미씨 측을 공동대리한 법무법인 로고스의 배인구 변호사는 "양성평등에 입각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이 많이 변화하고 있고, 여성에게도 종회 회원의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이 선고되는 등 법질서 역시 변화하고 있다"며 "장남을 우선시하는 과거의 관습은 더 이상 현재의 관습과 사회적 정당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미씨는 1·2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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