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도 못 만나고 한 진술이 '유죄' 증거라고?

[우리 삶을 바꾼 변호사] 김선수 대법관, 홍성담 국가보안법 사건 '간첩 혐의' 무죄 판결 끌어내

송민경 (변호사) 기자 2018.10.04 05:02
김선수 신임 대법관이 지난 8월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스1

약 40년만에 첫 '순수 재야' 출신으로 대법관에 오른 김선수 대법관(57·사법연수원 17기). 그는 변호사 시절에도 대법원에서 새로운 판결을 수없이 끌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화가 홍성담씨 국가보안법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김 대법관은 홍씨의 변호인을 맡아 '변호인을 만나지 못한 채 검찰에 한 진술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무죄 취지의 판결을 이끌었다. 

1989년 7월, 홍씨는 갑자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끌려가 간첩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훗날 이른바 '민미련(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간첩 조작'으로 불리게 된 사건이다. 
그해 결성된 민미련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 걸개그림을 제작해 전국을 돌며 전시했다. 그 과정에서 관련 슬라이드를 제작해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보내 전시하기도 했는데, 홍씨도 여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연행됐다. 

홍씨의 변호를 맡게 된 김 대법관은 홍씨를 직접 만나려 했지만 안기부로부터 '접견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 때문에 홍씨는 변호인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검사로부터 피의자신문을 받고 조서에 날인까지 해야 했다. 김 대법관이 홍씨를 만난 건 강제 연행 후 약 20일이 지나 준항고 등 법적 절차를 밟은 뒤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김 대법관은 검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안기부가 변호인 접견을 막는 등 수사 과정에 불법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증거보전 절차를 거쳐 고문을 한 흔적에 대해 증거 기록을 확보해 함께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변론에도 불구하고 1990년 1월 1심과 같은 해 6월 2심은 모두 홍씨에게 간첩과 이적표현물 제작 등의 혐의가 인정된다면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사건을 맡은 이회창 당시 대법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해 9월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변호인 접견 불허 기간 중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 조서는 증거 능력이 없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은 “헌법상 보장된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이 위법하게 제한된 상태에서 얻어진 피의자의 자백은 유죄의 증거에서 실질적이고 완전하게 배제해야 한다”며 “변호인의 접견 신청이 불허된 기간에 있었던 피의자 신문에 대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결국 홍씨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김 대법관이 끌어낸 이 판결은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을 헌법상 권리로 격상시키고, 형사소송법상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을 명문화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법시스템을 진일보시킨 판례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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