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통치기간에 이런 불상사가…"

[비선실록(秘線實錄) 제22화-문화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반국가단체가 지원 받는 건 잘못됐다는 게 평소 신념"

송민경 (변호사) 기자 2018.10.17 04:00



2015년 4월3일, 광화문 우체국을 통해 익일특급으로 청와대에 한 민원이 날아들었다. ‘박근혜 대통령님께’로 시작하는 4장 분량의 손편지였다. 보낸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성심여고 시절 은사였던 김모 교수.


이를 전달받아 보관하고 있던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은 2017년 4월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편지를 임의제출했다. 이 편지에는 당시 보수 문인 단체들이 느끼고 있던 불만이 잘 드러나 있다. 문화계 진보인사들에 대한 지원 축소를 골자로 한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시작된 건 이즈음이다.


김 교수는 편지에서 “문체부에서 매년 보내던 지원금을 금년부터 전액 삭감하기로 했다”면서 “불과 2000만원 지원하던 것마저 중단하는 이런 조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썼다. 이어 “심사위원들부터 문제가 있다”면서 “1970년대부터 반정부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었던 잡지들에게는 지원을 확대하고 정통파(소위 보수 진영) 잡지들에게는 철퇴를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편지엔 “명분으로 내세우는 ‘우수 잡지’는 대외선전용이고 보수파 문학 단체를 고사시키려는 것”이라며 “보수 문인 단체 사람들도 반성할 점이 없지 않지만, ‘문화 융성’을 강조했고 문인이신 박 대통령 통치기간에 이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즉시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김 전 수석에게 뭐라고 했을까?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박영수 특검팀의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항상 우리나라 문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소위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들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은사님으로부터 그런 민원을 받고 다시 김 전 수석에게 지시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박 전 대통령은 정확한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그동안 지원받지 못한 곳에도 지원을 해야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 전 수석은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2015년 4월3일 광화문 우체국을 통해 익일특급으로 청와대에 날아든 자필 민원 편지의 봉투.


◇박근혜 "문화계가 한쪽으로 편향된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를 향유할 권리와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권리와 자유가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침해당한 사건이 바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박영수 특검팀과 검찰의 수사를 통해 드러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박 전 대통령은 문화예술계가 진보적으로 편향됐고 이른바 ‘좌파’들이 지원을 많이 받는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와 문체부는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을 지원에서 배제했다. 반대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화·예술 단체들은 지원하거나 지원금을 미끼로 사상 검증을 벌였다. 


시작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진보 진영에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박 전 대통령의 신념이었다. 다음은 박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21일 서울중앙지검 1001호 영상녹화조사실에서 검사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검사(이하 검) : 박근혜정부의 ‘비정상의 정상화’ 개혁 과제 측면에서 피의자가 취임한 이후 개혁해야 될 문화계의 문제점은 어떤 것이 있었나?
박 전 대통령(이하 박) : 문화계가 한 쪽으로 편향된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검 : 피의자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종북세력이 장악한 문화계를 사정하는 것이 중요한 국정과제다’ ‘반정부 성향 단체들에 대한 지원 실태를 조사하고, 조치하라’는 내용의 말을 한 사실이 있나?
박 : 없다.

박영수 특검팀의 조사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혐의들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했다. 혐의를 뒷받침하는 문건이나 진술을 제시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는 ‘보고 받은 사실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박근혜정부에서는 문화예술계 관련 여러 사업들이 블랙리스트에 따라 지원 대상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쳤다. 당시 지원 사업 공고 중 하나.

그러나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청와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됐다. 2014년 5월쯤 박근혜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이란 문건을 작성했다. 여기엔 △총 130건, 139억원의 문제단체 지원 예산 차단 조치 △3천개의 문제단체와 8천명의 좌편향 인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보완 예정 △정부 공모사업 심사위원 중 좌편향 인사 26명 배제 △정부위원회 위원 중 70명의 좌편향 인사 해촉 예정 △개선의지 부족한 문체부장관의 교체 필요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당시 청와대는 김 전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 각 수석실별 비서관이 참여하는 ‘민간단체 보조금 TF(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10월쯤엔 ‘건전 문화예술 생태계 진흥 및 지원 방안’이라는 보고서가 문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이행하기 위해 ‘건전 콘텐츠 활성화 TF’가 운영됐다. 이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위원 선정, 문예기금 지원 심의, 영화진흥사업 지원 심사, 출판진흥원의 도서 선정 심사 등에서 이른바 ‘반정부·좌파 단체’들에 대한 지원배제 조치가 이뤄졌다.


◇박근혜 "반국가단체가 지원 받는 건 잘못됐다는 게 평소 신념"


2014년 10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박근혜정부를 비판한 영화 '다이빙벨'과 관련해 김 전 비서실장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윤선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부국제)의 전좌석 관람권을 일괄 매입해 일반 시민들이 관람하지 못하게 하고, 상영 후 이를 폄하하는 관람평을 게시토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 영화를 상영한 부국제는 2014년 14억6000만원이었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을 아예 받지 못할 뻔 했다가 간신히 8억원만 받을 수 있었다. 


출판진흥원이 독서문화 향상을 목적으로 ‘세종도서’를 선정해 1000만원 상당을 지원하고 인세를 지급하는 내용의 사업에 대해서도 박근혜정부의 개입이 이뤄졌다. 그 결과, 2014년엔 5·18 민주화 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등 총 9종의 도서, 2015년엔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등 총 13종의 도서가 지원에서 최종 배제됐다.


지난해 10월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 모습./사진=뉴스1

수사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은 블랙리스트의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건전 콘텐츠'에 대해 모른다고 부인했다. 참모진들이 알아서 한 것이며 지시한 적도, 보고를 받은 적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다음은 박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12일 서울구치소 내 조사실에서 검사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검 : 피의자는 ‘건전 콘텐츠’를 알고 있나?
박 : 글쎄, 그런 표현을 들은 기억이 없다.
검 : 피의자가 ‘건전 콘텐츠’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맞나?
박 : ‘건전 콘텐츠’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평소 신념은 종북단체와 친북단체 등 반국가 단체들이 지원을 받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자유와 창의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종북단체들이 문화예술을 빙자해 국민을 현혹시키는 것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검 : 피의자가 비서진들에게 ‘문화예술계 좌편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지시를 했기 때문에 비서진들이 이를 위한 방안 및 조치를 마련해 피의자에게 보고하고, 그대로 이행한 것 아닌가?
박 : 비서진들이나 참모들이 큰 틀에서 대통령의 생각을 알고 있지 않겠나. 국가 수호관, 국방 외교에 대한 제 입장을 보면 제 생각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검 : 비서진들이 피의자에게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139억원의 문제단체 지원 예산 차단 (중략) 등의 민감한 조치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박 : 실무자선에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보고 받은 기억이 없다. 전혀 모르는 내용들이다.


그러면서도 박 전 대통령은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과 이념과 생각을 보고 자신들의 입장과 같은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라며 "그런 국민들이 선출해 준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화이트리스트'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사진=뉴스1


◇법원 "관여한 사람 모두 죄책 져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은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실장, 조 전 수석 등은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2심 법원은 “사상·표현·예술의 자유 등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헌법 수호를 위해 국민에게 부여 받은 대통령의 권한이 오히려 헌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징역 4년으로 형량이 늘었다. 조 전 수석은 1심에서는 블랙리스트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는 지원배제 관여 혐의가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구속 만기로 석방됐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의 2심 재판부는 "대통령은 문예계가 좌편향돼 있다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라 좌파 지원배제라는 정책 기조가 형성됐다"며 "그런 위법한 지원배제에 관여한 사람 모두는 그런 결과물에 대해 죄책을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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