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안 보여주고 압수한 노트가 '유죄' 증거라고?"

[우리 삶을 바꾼 판사] 박일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대법관 시절 "압수수색 절차 어기고 수집한 증거는 무효' 판결 주도

송민경 (변호사) 기자 2018.10.19 04:02


박일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전 대법관)


영장에 기재된 압수수색의 범위를 벗어나 수사기관이 확보한 증거가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2007년 11월 이전까진 그랬다. 당시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도 ‘진술 아닌 증거’라면 유죄의 증거로 인정됐다. 물건 자체가 바뀐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2007년 11월 대법원이 "헌법 및 형사소송법이 정한 압수수색 절차를 위반해 수집한 증거는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07도3061 판결) 이는 증거 수집 절차의 문제 때문에 무죄가 선고된 당시로선 획기적인 판결로,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을 앞서 실현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 이 새로운 판결을 이끌어낸 주인공이 바로 당시 대법관으로서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박일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67·사법연수원 5기)다. 


때는 2006년 4월. 같은 해 5월에 있는 지방선거로 전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는 공무원과 대학교수 등이 김태환 당시 제주도지사의 도지사후보 TV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공무원을 동원한 선거운동은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선관위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제주지검 검사와 수사관들이 제주도청 건물에 들이닥쳤다. 제주도청 정책특별보좌관(정책특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던 과정에서 검찰은 압수수색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정책특보실에 들어오고 있던 비서관 한모씨의 노트를 증거물로 확보했다.

2006년 5월 선거에서 김 전 지사는 다시 당선됐다. 하지만 검찰은 그를 같은 해 10월 ‘공무원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기획했다’며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제주도지사 자리를 걸고 법정 다툼이 시작됐다.

주된 쟁점은 ‘압수수색 절차가 제대로 지켜졌는가’였다.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압수수색 영장의 범위는 ‘제주도지사 정책특보 사무실’로 제한돼 있었다. 검찰이 당시 한씨에게 영장조차 제시하지 않은 만큼 그의 노트는 영장 범위를 넘어 확보한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하고 따라서 증거능력이 없다는 게 김 전 지사 측의 주장이었다.


1·2심에선 유죄가 인정돼 벌금 600만원이 선고됐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중요성을 고려해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공개변론까지 열며 사건을 면밀히 심리했다.


결국 대법원은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김 전 지사의 유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김 전 지사는 광주고법과 대법원을 거쳐 무죄를 확정받고 제주지사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주심 대법관이었던 박 변호사는 “당시 대법관 토론 과정에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미국 등 선진국의 판례 연구를 충분히 검토해 설득한 끝에 판례를 바꿀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에 실린 대법관 3인(양승태, 김능환, 안대희)의 별개의견이 격렬했던 토론 과정을 말해준다. 


박 변호사는 "이전까진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가 제시되더라도 그 증거 외에도 다른 유죄의 증거가 있어 사건의 결론에는 영향이 없는 사건이 대다수였다”면서 “그런데 이 사건은 특별히 그 증거를 빼면 유죄로 볼 수 있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던 케이스여서 의미가 각별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 판결 직후인 2008년 1월1일부터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이 명시된 개정 형사소송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법보다 앞서 판결이 세상을 바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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