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일반

체결 직전 엎어진 계약…손해배상 어디까지 청구되나

[친절한 판례氏] 대법원 "'신뢰손해' 범위 내에서 물질적 손해 배상해야…정신적 고통 손배도 별도로 가능"

김종훈 기자 2019.02.12 05:30

계약이라고 하면 보통 하얀 계약서에 도장 찍고 서명하는 것을 떠올리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병원에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은 일종의 도급계약이다. 편의점에서 잔돈이 부족해 친구에게 잠시 돈을 빌리는 것은 소비대차 계약에 속한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알게 모르게 수많은 계약을 맺고 실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만큼 계약에 대해 정확히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계약은 실행할 때보다 파기할 때 더 문제가 된다. 특히 계약이 완전히 체결되기 전 단계에서 갑자기 엎어진다면 매우 난감해진다. 계약을 위해 시간·비용을 들여 준비해놓은 것들을 써먹을 수 없게 됐으니 그만큼 손해다. 경우에 따라 계약 무산 때문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아직 계약이 완전히 체결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에게 물질·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우리 대법원은 2001다53059호 사건에서 '가능하다'는 취지로 판결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가 수출 1000억 달러를 달성한 1995년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수출 1000억 달러 달성 기념으로 조형물을 설치하기로 하고 분야별 전문가들을 섭외해 시안을 받기로 했다. 이때 조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A씨 등 4명이 시안을 제작할 작가로 섭외됐다. A씨 등은 1996년 5월 시안을 제출했고 정부는 몇 가지를 보완해달라는 조건과 함께 이 시안을 최종 시안으로 확정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후 절차가 생각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던 데다 IMF 위기가 닥쳐 1999년까지 담당부처인 산업자원부 장관이 5번이나 바뀌었다. 경제 위기 상황에 수출 1000억 달러를 기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정부의 조형물 사업 계약은 1999년 6월 무산됐다.

A씨는 정부가 이미 성립된 계약을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파기했다며 5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조형물 건립 계약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했음은 물론, 사업 취소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며 정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정부가 성립된 계약을 파기했다는 A씨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정부가 시안이 당선된 작가 사이에 계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명했다 하더라도 의사표시 안에 조형물의 제작·납품 및 설치에 필요한 제작대금, 제작시기, 설치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던 이상 시안 제작 의뢰를 계약 청약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이어 "A씨가 시안을 제작하고 정부가 이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에 구체적으로 계약의 청약과 승낙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계약 체결을 거절한 것은 민법상 불법행위에 해당하므로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헀다. 대법원은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해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 체결을 거부해 손해를 입혔다면 계약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지적했다.

이때 손해배상의 범위에 대해 대법원은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해 입었던 손해, 즉 신뢰손해에 한정된다"고 판단했다. 신뢰손해의 기준에 대해 대법원은 "예컨대 계약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준비비용과 같이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않았을 비용 상당이 손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한 제안서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이로 인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대법원은 "계약교섭의 파기로 인한 불법행위가 인격적 법익을 침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에 대해 별도로 배상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법원은 정부가 A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정부가 3년 가까이 계약체결에 관한 협의를 미루다 갑자기 사업 철회를 선언하고 계약을 거부한 것은 불법행위가 맞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조형물 작가로서 명예감정과 사회적 명성에 손해를 봤다는 A씨 주장도 받아들였다.

다만 재판부는 △계약이 이미 체결됐음을 전제로 하는 A씨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 △시안을 제작할 당시 소요된 비용은 계약 체결의 신뢰가 부여되기 전에 지출된 것으로 신뢰손해라고 보기 어려운 점 △그 외 신뢰손해에 속한다고 볼 만한 지출이 있었다는 자료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해 배상 액수를 3000만원으로 줄였다.

관련 법령

민법

제527조(계약의 청약의 구속력) 계약의 청약은 이를 철회하지 못한다.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제751조 (재산이외의 손해의 배상) ①타인의 신체,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

②법원은 전항의 손해배상을 정기금채무로 지급할 것을 명할 수 있고 그 이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상당한 담보의 제공을 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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