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놔 달랬더니 전세보증금 받아 잠적한 중개인, 어쩌면 좋죠?

[엄마 변호사의 세상사는 法]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의 정당한 이유 판단 기준

박윤정 변호사 2019.03.22 05:00

삽화=이지혜 디자인기자

진호(가명)씨는 최근 월세를 준 원룸 세입자로부터 몇 달째 월세가 입금되지 않아 계약서에 적힌 세입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가 당황스러운 답변을 들었습니다. 세입자는 자신이 월세계약이 아닌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들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진호씨가 부동산중개업소에 전화를 해보니 받지 않았고, 급히 찾아가보니 이미 중개인은 종적을 감춘 후였습니다. 세입자를 직접 만나 들은 계약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 일대에 전세매물이 워낙 귀해 전세가 있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듣고 급히 계약이 진행됐다.

○ 워낙 급히 체결된 계약이라 그 당시에는 집주인인 진호씨 명의의 임대차계약 체결 위임장만 확인했을 뿐이고 집주인의 인감도장 없이 우선 막도장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 계약금은 현금으로 중개업자에게 지급했다.

○ 위임장 내용이 솔직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 잔금을 치르기 전 중개인이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확인시켜 줬고, 확인 후 바로 중개인이 알려주는 계좌로 잔금을 입금했다.

○ 잔금 지급 계좌의 명의인이 집주인 명의와 같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있어 부인 명의로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다. 계좌 명의인이 실제 집주인의 부인 명의와 같은지까지는 솔직히 확인해보지 않았다.

○ 집주인을 만나고 싶었지만 중개인이 집주인이 해외체류 중이고 자신이 수차례 이 집의 임대차계약 체결을 대리해왔다 하기에 굳이 만날 필요 없겠다고 생각하고 더 요구하지 않았다.

○ 계약서에 적힌 집주인 전화번호로 연락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호씨는 중개인에게 월세계약을 체결해달라고 부탁하고 월세계약 체결 위임장을 작성했을 뿐이었고, 인감도장은 물론 인감증명서도 중개인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줄곧 국내에 있었고, 전세 계약 체결 당시에는 미혼이라 부인 명의라는 것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이 같은 사기 행각을 감추기 위해 진호씨에게 월세계약이 잘 체결됐다며 계약서를 건네며 소액의 월세보증금을 계좌로 입금해주고 매달 월세를 진호씨 계좌로 입금해줬습니다. 그래서 진호씨는 지금껏 계약이 잘못됐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세입자는 나갈 테니 전세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 진호씨는 전세보증금을 돌려줘야 할까요?

▶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의무는 진호씨가 중개인의 사기행위로 체결된 계약에 따른 책임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호씨는 중개인에게 전세계약 체결의 대리권을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중개인의 계약 체결행위는 무권대리(無勸代理, 권한이 없는 대리)이고, 원칙적으로 본인인 진호씨에 대한 관계에서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법은 제125, 126, 129조에서 거래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경우 본인에게 계약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를 표현대리(表現代理)라 합니다. 이 중 진호씨 사례에서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규정은 ‘제126조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입니다. 진호씨는 ‘월세’계약을 체결할 권한은 중개인에게 위임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법 제126조는 ‘대리인이 그 권한 외의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 제삼자가 그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본인은 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례에서는 ‘세입자가 중개인이 전세계약을 체결한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가 쟁점이 됩니다.

 

같은 중개사기라 해도 개별 사안마다 대리인의 행동 방식과 계약 체결 상대방의 대응 방식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당한 이유’ 판단은 긍정 요소와 부정 요소 여러 가지를 놓고 어느 편이 더 보호 가치가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므로 이 정도의 진술만 듣고 단정적으로 결론 내리기는 매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주어진 사실관계에 기초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판단을 해보자면, 진호씨가 종전에도 같은 중개인을 통해 대리방식으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해왔던 것은 세입자 입장에서 ‘대리권 존재를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긍정할만한 요인으로 볼 여지도 있겠으나, 세입자가 전세계약 체결 위임장을 확인한 것도 아닌 거로 보이고 계약 체결 당시 집주인인 진호씨의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확인한 것도 아니며[정당한 이유 판단의 기준시점은 ‘계약 체결 당시’이므로 계약 체결 이후 잔금 지급시에 인감도장 등을 확인한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대법원 80다3247 판결)] 잔금 지급 계좌 명의인이 집주인의 이름과 같지 않은 등의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본인을 대면 하지도 않았고, 전화로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점은 세입자에게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볼 여지가 더 큰 경우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라면 집주인인 진호씨가 임대차계약에 따른 전세금반환의무를 진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 경우 세입자는 중개인에 대해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전세보증금 상당액을 배상받거나 미리 받아둔 손해배상책임보험증서에 따라 중개사고에 따른 보험금을 청구해 보전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기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한 중개인이 검거된다 해도 배상할 금전적 여력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작고 책임보험금 한도가 연간 1억원에 불과해 같은 공인중개사가 여러 건의 사기범행을 저질렀을 경우 온전하게 배상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 물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중개사기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중개인을 사기,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죄로 고소한 후 중개인에 대한 조사를 통해 계약 체결 당시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 많은 경우에 중개인만 사기 등 죄로 유죄판결을 받게 하면 집주인은 세입자에 대한 보증금반환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것으로 오해하는데, 중개인이 사기 등 죄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은 무권대리를 입증할 자료가 될 뿐 표현대리규정 적용에 따른 본인 책임의 유무를 가를 기준이 되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중개인에 대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은 별도로 진행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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