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36.5]낙태권과 시술 거부권 사이

배성준 부장 2019.05.28 06:00
"형법 269조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인공임신중절을 처벌하도록 한 이 조항은 지난 4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제정 66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이로써 낙태에서 ‘죄’라는 주홍글씨가 떨어지고, 말 못하는 태아의 송사도 마무리된 듯 보였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관련법 개정은 국회의 몫이 됐고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낙태 시술의 당사자인 의사들의 외침이다. 임신 유지 여부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려는 의사들의 낙태 시술 거부권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달에는 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합법화, 저는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라는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렸고 3만6000여 명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이 글에서 그는 10년 이상 출산의 현장을 지켰기에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를 매일 느꼈다고 말했다. 만일 낙태가 산부인과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시술로 결정된다면 의사의 길을 접겠다고 강조했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해서는 안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낙태 시술이 싫으면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낙태죄를 유지하는 나라에서는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가 고발 위협에 노출돼 있고 낙태죄가 폐지된 나라에서는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가 취업제한이나 명단공개 압박을 받는다. 

만일 대다수 의사가 낙태시술을 거부하면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여성의 권리도 제한받게 된다. 지난해 발간된 '유럽 낙태 여행'을 보면 이탈리아에서는 10명의 의사 중 7명이 낙태 진료를 거부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는 정부 허가를 받은 12개 의료기관에서만 임신중단이 가능해 여성들이 낙태 시술이 가능한 다른 나라의 의료기관을 찾아가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다.   

또 하나의 논란은 낙태 허용 기준인 22주다. 헌재는 위헌 판단을 내리면서 임신 22주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기로 이때까지를 임신 유지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충분한 시점으로 봤다.

반면 프로라이프의사회 등 낙태 반대 의사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임신 9~12주 사이만 되도 태아는 이목구비가 생기고 팔 다리의 구분도 확실해질 뿐 아니라 뇌기능도 완성돼 태아로서 기능이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생명은 연결 선상에 있는 것이지 편의에 따라 22주를 기준으로 '어제까지는 생명이 아니다가 오늘부터 생명이다'라는 식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 이들은 낙태 시술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을 호소하기도 한다. 낙태 시술로 세상에 나온 태아를 처리하면서 불면증이나 우울증 등 고통을 겪는 의료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최근 낙태 진료거부권 요구 방침을 세웠다. 낙태에 대한 의사 개인의 신념도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중심인 논의에는 곧 간호사, 약사, 조산사 등 모든 의료인이 포함될 것이다. 갈 길이 먼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국회와 법무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등 관련 부처는 ‘차질 없이 진행해 나갈 예정’이란 공허한 소리만 내놓았을 뿐, 후속조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완전한 피임법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태아의 생명도,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소중한 권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에 못지않게 의사의 선택권도 소중한 권리다. 다만 찬반의 문제도, 선악의 문제도, 다수결로 결정할 일도 아니라는 것에 어려움이 따를 뿐이다. 

그렇기에 묻고 싶다. 낙태가 죄라면 그것은 누구의 죄였던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미 태어난 생명들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 탓은 아닌지, 저출산으로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보육 환경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은 이뤄지지 않은 탓에 생명 탄생을 지켜야 하는 의사들에게 동시에 낙태 시술을 하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오늘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법 개정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진짜 논의는 ‘국가가 생명보호를 위해 사회적 조건과 지원체계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부디 관련 부처는 무거운 책임의식을 갖고 깊이 고민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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