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살롱] 35억짜리 '꼬마 ISD', 얕봐선 안되는 이유

한국계 외국인 2명, 공시지가 기준 보상방식에 정면 문제제기... 국내정책과의 '충돌'을 어떻게 피할 것인지도 넘어서야

황국상 기자 2019.06.09 06:00
지난 1월22일 오후 서울 중구 세운3구역 상가 인근에 재개발 반대 문구가 걸려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누군가에게는 부(富)의 증식수단인 재개발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기억되곤 합니다. 종전 거주민들을 강압적으로 몰아내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등장했던 이들을 지칭하는 '철거깡패'라는 단어는 한 때 재개발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재개발을 할 때면 토지의 강제수용이 불가피합니다. 종전 거주민들의 일정 비율 이상이 찬성하면 소수 의견에 관계 없이 강제로 토지·건물의 소유권을 박탈해 일괄해서 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부동산의 보상액 기준이 '공시지가'라는 점입니다. 공시지가는 정부가 책정하는 토지·건물 등의 기준가액으로 각종 세금이나 부담금 등을 부과할 때 기준으로 사용됩니다. 토지보상법 등 각종 법령 역시 강제수용 과정에서 토지를 수용할 때 보상액의 기준을 공시지가로 하라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공시지가는 실제 거래액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한 예로 네이버부동산 등에 따르면 서울 대치동의 E아파트의 경우 최근 실매매 거래가격이 16억~19억원에 달했지만 공시지가는 9억원대 초반에 그칩니다. 정상적인 매매 과정을 통해 팔았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던 수용지구 부동산 소유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공시지가 기준 보상' 시스템입니다.

국내에서도 공시지가 기준 보상 시스템이 옳은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법적 논쟁이 많았습니다. 헌법재판소에 공시지가 기준 보상 시스템의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는 헌법소원 청구도 많았습니다. 헌재는 "토지수용으로 인한 손실보상액의 산정을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하되 그 공시기준일로부터 가격시점까지의 시점보정을 지가상승률 등에 의해 행하도록 규정한 것은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며 그 이유로 △공시지가가 공시 기준일 당시의 표준지의 객관적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한다는 점 △공시기준일 이후 수용시점까지 시가변동을 산출하는 시점보정의 방법이 적정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요컨대 '공시지가 기준 보상 시스템'은 합헌이라는 얘기입니다. 심판 대상이 된 조항이나 법의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공시지가 기준 시스템'이 합헌이라는 헌재의 입장은 계속 유지돼 왔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공시지가 기준 보상방식에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제기됐습니다. 정부에 따르면 한국계 캐나다인 A씨가 지난달 하순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투자자·국가 분쟁) 중재 의향서를 제출했습니다. 중재 의향서가 접수된 후 90일이 지나면 A씨는 정식으로 중재를 제기할 수 있게 됩니다.

A씨는 2006년 6월 서울 시내의 192㎡(약 58평) 규모의 땅과 그 위에 세워진 3층짜리 상업용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그는 2015년 3월 캐나다인으로 국적을 바꿨습니다. A씨 소유의 부동산은 재개발 대상지구에 포함돼 수용대상이 됐습니다.

A씨는 중재 의향서를 통해 △해당 재개발 사업은 그 이익이 재개발 조합과 민간 건설사에게만 귀속된다는 점에서 '공공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부동산이 강제수용되는 것은 '공공목적 이외의 강제수용'을 금하고 있는 한국·캐나다 양국이 체결한 FTA(자유무역협정)에 위배되며 △공시지가 및 재개발 조합이 산정한 평가액에 따르면 손실이 300만달러(약 35억6000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합리적 제안'을 내놓을 경우 자신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보상액의 증액을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입니다.

앞서 2017년 9월에도 한국계 미국인인 B씨가 서울 마포구 소재 자신의 부동산이 재개발 과정에서 강제수용된 데 대해 한·미 FTA를 근거로 한국정부를 상대로 중재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B씨 측은 "보상금이 자의적으로 결정됐다. (보상액이) 공정한 시장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서울특별시 합동으로 국제투자분쟁대응단을 꾸려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각종 ISD 사건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관계자는 A씨 등의 사건에 대해 "국제법상에서 한국의 수용보상제도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이 쟁점이 될 것"이라며 "국제법상의 수용보상제도의 보상 정도가 한국에 비해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A,B씨가 제기한 ISD 사건의 규모는 각각 300만달러로 투자분쟁 중재 사건 중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꼽힙니다. 2012년 론스타가 외환은행 투자 회수 과정을 문제 삼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ISD 사건의 규모는 5조5000억원에 달합니다. 그러나 A,B씨가 만약 중재에서 승소할 경우 그 여파는 단지 '300만달러'의 2명 몫인 '600만달러'에 그치지 않습니다.

통계청이 운영하는 'e나라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기준으로 외국 국적자가 국내에 보유한 부동산은 13만7000여 필지로 공시지가 규모만 30조원에 육박합니다. 공시지가 기준보다 더 큰 금액의 보상액이 주어져야 한다는 판정이 나올 경우 과거 재개발 과정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을 당했던 외국인 부동산 보유자들이 잇따라 중재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A,B씨가 중재에서 이길 경우 외국인 뿐 아니라 그간 공시지가 기준 체계를 감내해야 했던 국내 부동산 소유자들의 불만도 커질 수 있습니다. 자칫 외국인에 비해 내국인을 역차별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같은 관측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A,B씨의 주장에 맞서 중재에 대응하는 쪽도 정부이지만 '기존 공시지가 체계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쪽 역시 정부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정부의 한 축에서는 '한국법의 토지보상 체계가 적정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정부의 한 부처에서는 "공시지가가 시세의 53%만 반영하고 있다"(2019년 1월29일자 국토교통부 보도자료)며 공평과세를 목적으로 공시지가의 '현실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국제중재 부문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A,B씨 사건에 대해 "투자협정에서 외국인에게 '페어마킷 밸류', 즉 공정한 시장가치대로 보상해준다는 문구가 분명히 있는 만큼 공시지가 기준이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며 "중재판정부에 '공시지가가 실제 시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부 보도자료를 제출할 경우 A,B씨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목적을 두고 추진되는 정책이 다른 측면에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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