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36.5] 사법농단과 공판중심주의

배성준 부장 2019.06.26 06:00
어떤 경우에도 어느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대하는 집단이나 직업군이 존재할까? 있다면 누구일까? 종교지도자나 판사가 그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 공정함의 상징인 판사를 사람들은 언제 만나게 될까? 자신이 가장 무기력해지는 장소, 벼랑 끝에서 풀뿌리라도 잡고 싶은 순간, 내 인생을 좌우할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나게 된다. 바로 법정에서 말이다. 

판사는 재판 중에 만나게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뜻밖에도 그 답은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인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 엿보인다. 

“이의 있습니다.” 피고인 임 전 차장이 법정에서 검사의 증인신문을 제지한다. 검찰의 공소가 "검찰 발 미세먼지로 생긴 신기루"라며 반격의 날을 세운다. 형사소송법을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피고인의 말에 재판장과 배석 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한다. 일반 재판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은 지난해 12월부터 20여차례 열렸지만 아직 증인신문이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재판기피 신청까지 내면서 길어만 지고 있다. 피고인이 아직도 자신을 판사로 착각하고 있다는 비난과 재판부가 지나치게 임 전 차장에게 끌려 다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임 전 차장은 평생을 판사로 살았던 사람이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법과 절차를 통해 관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사법 절차에 흠결이 없도록 해야 하는 재판부로서는 그만큼 고민이 더 깊을 것이다. 

물론 검사를 향해 호통 치거나 재판장 같은 임 전 차장의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재판부가 헌법 제 27조 제4항의 규정처럼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에 따라 피고인의 방어권과 항변권을 보장하고 증거 하나하나를 두고 첨예하게 다투며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지켜가는 모습은 법원이 지켜야할 원칙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공판중심주의'는 일반 국민들의 공판에서도 잘 지켜질까?  피해자로 또는 피고인으로 법정에서 나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심리적 압박 속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제대로 된 방어권이 행사될 리 없다. 두서없는 진술은 재판부로부터 제지당하기 일쑤다. 재판을 경험한 상당수는 재판의 결과뿐 아니라 어려운 절차와 과정, 고압적인 공판 분위기로 인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고 호소한다.
 
설상가상으로 변협에서 공개하는 법관평가를 보면 "왜 이렇게 더러운 사건이 오느냐", 초등학교 학력 남편에게는 "대학 나온 부인과 마약 먹여서 결혼한 것 아니냐" 라는 등 일부이긴 하나 판사들의 막말도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날개 잃은 사법부에 추락 가속도를 높여 주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는 사법농단, 재판거래 의혹 등으로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한번 흔들린 사법부의 위상이 단시간에 회복될 리는 없다.  신뢰 회복을 위해 사법부에 필요한 것은 거악이나 전 정권의 비리척결을 위한 시대정신 못지않게 작은 재판(물론 사건 당사자인 개개인에게 작은 재판이란 있을 수 없지만)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되 최대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라틴어로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이라는 뜻이다. 타불라는 태블릿(tablet) 즉 판(板)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재판에 나올 때 판사들은 자신의 마음 판에 이 타불라 라사를 새기길 바란다. 그래서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고, 재판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적극적으로 듣고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고 죄의 여부를 가려 명확히 정의를 선언하는 그런 담대한 판사를 보고 싶다. 
사법부의 추락한 신뢰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지가 모일때 회복될 수 있으며, 그때야 비로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서 사법부는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공유하기

1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