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36.5]판사의 언어, 기자의 이야기

배성준 부장 2019.09.22 15:03
취재가 일상인 기자들에게는 직업적으로 갖는 특수성이 있다. 그중 하나가 “요컨대 000 이죠?”다.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예를 섞어 가며 한참을 설명해도, ‘결국 000라는 뜻’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기사를 작성한다. 하지만 섣불리 예단도 결론도 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법원의 언어가 그렇다. 지난달 29일, 2년 넘게 이어졌던 국정농단 사건의 대법원 선고가 내려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던 중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었다. 판결 논리가 아닌 ‘용어’에 대해서였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답답함을 주었던 부분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었다.“안종범의 업무수첩은…(중략) 굳이 반대신문의 기회부여가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신용성에 대한 정황적 보장이 있는 문서라고 보이지 않는다.”  ‘고도의 신용성에 관한 정황적 보장’은 무슨 뜻일까? 곧바로 찾아보니 진술이 신뢰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음을 의미했다. 

그러고 보니 갓 입사하여 법조출입 막내기자시절에도 법률 용어 때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형사사건의 선고공판 때였는데 유죄를 인정한 판사가 “가사 피고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라며 주문이유를 낭독하는 대목에서 순간 ‘가사, 이게 뭐지? 집안일? 그게 여기서 왜 나오지?’ 나중에야 가사의 뜻이 ‘만약이나 설령’이었음을 알게 됐다. 

사위(詐僞)라는 어려운 한자도 있었다. 속임이나 거짓을 뜻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다른 재판에서 듣게 된 압날(押捺)이란 단어는 ‘도장을 찍다’였고, ‘지득(知得)하다’나 ‘노임’도  ‘알게 되다’ 와 ‘임금’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형적인 일본식 한자다. 뿐만 아니라 판사의 언어 중에는 “~가 아니라고 볼 수 없지 않다”와 같은 복잡한 문장구조도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기자로서 아는 게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날 초임 판사와 가졌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판결문이 어려운 이유를 물었다. 첫째는 법조인들이 압축적인 의미의 법률 용어와 표현에 익숙하기 때문이고, 좀 더 솔직하게는 국민들이 보는 판결문이라는 생각보다는 아무래도 상급심 판사가 본다는 생각으로 쓰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왔다.

우리 법이 일본법의 영향을 받았듯 판결문에도 여전히 일본어 잔재가 남아있음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흔히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앵커링(anchoring) 효과 즉, 처음 제시된 조건에 얽매여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 사용에 따른 사회적 반감은 적지 않다. 사건관계자를 앞에 두고 쓰는  알 수 없고 어려운 용어들이 때로는 그들만의 리그를 상징하기도 하며, 때로는 권위로, 때로는 법조인이라는 직업군의 위상을 드러내며 사용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형법, 형사소송법과 같은 법률 용어의 변경으로 의미가 바뀌면 처벌 공백이나 혼선이 있을 수 있다고 항변한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그 분야에서 통용되는 고유한 의미를 가지므로 다른 단어로 대체가 어렵고, 법적 효력이 인정돼야 하므로 지정된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판사들 입장에서는 살면서 일반인이 판결문을 볼 일이 뭐가 있다고 관행처럼 써온 단어와 표현을 쉽게 바꾸라는 것인지, 왜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할까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일반인이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을 굳이 쓸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재판은 공공서비스이고 수요자는 국민이다. 

사법의 독립이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재판을 원하고 공감하려면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쉬운 용어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판결문의 취지가 더 잘 이해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작은 변화가 국민의 신뢰를 가져올 수 있다.
배성준 사회부 법조팀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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