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주의 PPL]1997년 이춘재는 사형될 수도 있었다

'인권시비'와 '검경 알력다툼'으로 '지연된 정의'

유동주 기자 2019.09.26 06:00
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56)씨가 부산 강서구 대저동 부산교도소에서 1995년부터 수감 중이다. 사진은 부산교도소 정문 모습. 2019.09.19. /사진=뉴시스


2019년 8월에서야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는 사형수가 될 수도 있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유전자은행이 계획대로 설립됐다면 그는 사형선고를 받을 뿐 아니라 실제 집행도 당할 수 있었다.

1994년 정부에 의해 유전자정보은행이 추진됐었고 처제성폭행살인사건으로 이춘재는 이미 재소자 신분이었다. 우리나라는 사형 집행을 안 하는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이지만, 마지막 사형은 1997년 12월30일 23명에 대해 동시에 집행됐다. 그 이전 재소자 유전자 정보를 활용가능했다면 충분히 이춘재를 범인으로 특정해 기소하고 사형선고도 가능했다.

◇지체된 범죄자 DNA 등록법 제정…지체된 화성 범인 찾기

1985년 영국에서 개발된 유전자감식기법은 1987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처음 법정증거로 채택됐다. 우리나라도 발빠르게 1990년대 초 미국·영국 등을 따라 유전자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유전자은행은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2010년에야 가능해졌다. 2010년 7월 ‘DNA데이터베이스 신원확인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범죄자DNA등록법)’이 시행되기 전엔 범죄자들의 유전자 정보를 모아 둘 법적 근거가 없었다.

정부 계획대로 1995년 유전자은행이 설립돼 살인죄 무기수 이춘재의 DNA가 대검찰청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고 화성사건 증거물에서 추출한 DNA와 대조했다면 재소자 이춘재는 용의자로 바로 특정될 수 있었다. 

올해 경찰은 미제사건을 재수사하면서 재감정을 위해 증거물에서 새로 DNA를 추출해 대검이 관리하는 재소자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비로소 이춘재를 특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그 이전에 화성사건 DNA자료가 전혀 없었던 게 아니다. 피해자들의 체내에서 검출된 정액 등을 일본 과학경찰연구소에서 분석한 자료가 이미 1991년부터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었다. 

국과수는 매해 연간 수천건의 성폭력 사건 DNA분석자료를 화성 범인의 그것과 반드시 대조했다. 화성 범인이 언젠가 재범을 하다 걸릴 거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춘재는 교도소에 있었고 그간 대조한 수만건의 성폭력 범죄자 DNA는 화성 범인과 일치할 리 없었다. 유전자은행설치법이 지체돼 경찰은 교도소 재소자 DNA를 대조해 볼 순 없었다.

2003년엔 재소자인 한 사형수가 스스로 화성사건 진범이라고 자백하는 소동이 있었다. 국과수 보관 자료와 대조를 통해 그 사형수가 화성 범인이 아님이 밝혀졌다. 공소시효가 끝난 2006년 이전, 재소자 이춘재에게서 보다 빨리 DNA를 채취해 대조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경기남부청 2부장)이 19일 오전 경기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50대 A씨를 찾은 경위와 증거 등 수사 진행상황을 설명한 뒤 인사하고 있다. 용의자로 특정된 50대의 이 남성은 화성살인사건을 저지른 뒤인 1994년 강간 살인 범죄를 저지르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0년 넘게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김창현 기자 chmt@

◇'인권시비'와 '검경 알력다툼'으로 늦어진 '범죄자 DNA정보' 관리

1990년 중반부터 추진된 유전자은행은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2006년에야 법안 형태로 처음 국회에 제출됐다. 법안 발의에만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6년엔 이미 세계 76개국이 유전자감식정보 관련 법률이 제정돼 있었다. 실제 국회를 통과해 시행된 건 2010년으로 다시 4년여가 흘렀다.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어떤 장애물들이 이춘재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걸 막고 20년이나 지체시켜 공소시효도 지나버렸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권시비’다. 

범죄자 집단의 유전자 관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인권침해‘라는 반대의견이 거셌다. 일부 인권단체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범죄자DNA등록법에도 반대한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상습 성폭력범에 대한 '전자발찌 의무화'도 약 15년전 입법 추진시에 인권침해라는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범죄자의 프라이버시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인권단체와 법률가 등에 의해 제기되면서 인권문제는 범죄자DNA등록법 제정에 큰 걸림돌이었다.

둘째, 검찰과 경찰의 범죄자DNA정보에 대한 주도권 싸움도 주요 원인이다.

1992년 2월27일 검찰은 서울대팀과 함께 개발한 유전자감식기법으로 과학수사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미국 법무부 FBI연구소에 유전자감식관을 파견할 계획이라며 전과자 유전자를 유형별로 분류·수집한 뒤 이를 전산자료로 입력시킨 '유전자은행'을 설립해 범죄자 관리에 나설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질세라 같은 해 5월 경찰 국과수는 김모양(당시 8세) 성폭행 사건 용의자 최모씨 혈액과 사건현장에서 신문지에 묻혀 수거된 범인의 정액을 유전자분석실에서 감식해 동일한 유전자형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유전자 감식에 의한 첫 범인 특정 사례를 발표한 것이다. 최씨는 이미 범행사실을 자백한 상태였지만 경찰은 최씨를 시범 케이스로 공개했다. 1991년 8월 만들어진 국과수 유전자분석실의 성과를 알리기 위함이다. 유전자분석실 자체가 화성사건에 대한 과학수사대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검경은 범죄자DNA정보를 서로 가져가려고 다퉜다. 결국 현재 '대검의 재소자'와 '경찰청의 구속피의자'로 이원화된 관리로 결정나기 전까지 둘은 유일한 관리주체가 되고 싶어 싸웠다. 

◇'지연된 정의'…화성사건이 주는 교훈

이춘재는 2011년 10월 DNA가 채취됐고 2012년 1월 대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됐다. 

만약 정부 계획대로 1996년경 유전자은행이 설립됐다면 1994년부터 수감된 이춘재는 DNA채취직후 범인으로 특정됐을 것이다. 그 당시 기술로도 충분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법언이 있다.

가장 유명한 장기 미제사건이었던 화성사건의 유전자정보 단서는 이미 널려 있었다. 패는 검찰과 경찰이 서로 나눠 갖고 있었다. 두 패를 진작에 맞춰 봤다면 연쇄살인 당시에는 잡지 못했어도 공소시효가 충분했을 때 검경의 DNA 공조수사로 간단히 풀 수도 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가 그 '정의실현'의 '지연'에 한몫 했는지 검토할 때다. 경찰은 재수사·재감정에 의한 치적만 앞세운다. 그런데 정작 법이 제정된 후 이춘재 DNA가 2012년 1월 대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고도 왜 7년간이나 화성사건 DNA와 대조조차 안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검은 이춘재로 특정된 직후 기자브리핑을 자청해 재소자 데이터베이스 조회를 통해 경찰 수사에 도움을 줬다고 자랑했다. 그렇다면 검찰도 이춘재 DNA를 확보한 이후 왜 장기 미제였던 화성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재소자 DNA와 대조해 볼 시도조차 안 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양 기관은 각자 관리하는 DNA정보를 수시로 상호 교환하는 게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화성사건도 경찰이 대검에 '의뢰 후 통보'의 방식으로 알아냈다. 실제로 양 기관이 서로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수시로 아무 걸림돌 없이 상호 검색 가능한 것처럼 알리고 있는 것은 국민 기만일 수 있다. 곧 다가올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서도 철저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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