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36.5] 사법부의 운명, 진실의 무게

배성준 부장 2019.10.22 05:32
사실(fact)의 반대는 허구이고, 진실(truth)의 반대는 거짓이다. 매우 명쾌한 것처럼 보이는 이 단어가 종종 모호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미술의 ‘극사실주의’ 트롱프뢰유 (trompe-l‘oeil)도 그중 하나이다. 

프랑스어로 눈속임이란 뜻의 ‘트롱프뢰유’는 사실이라고 착각할 만큼 정밀하고 생생한 그림이 특징이다. 트롱프뢰유 화풍을 잘 전해주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대결이 그것이다. 당시 으뜸가는 화가 제욱시스. 그가 포도를 그려놓으면 새들이 착각해 쪼아 먹으러 날아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의 앞에 경쟁자가 등장한다. 꽃을 잘 그리는 파라시우스였다. 심지어 세간에는 파라시우스가 더 낫다는 소문까지 퍼진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제욱시스는 곧장 파라시우스의 작업실로 달려간다. 그러나 파라시우스는 보이지 않고 커튼에 반쯤 가려진 꽃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림 앞으로 다가간 제욱시스는 커튼 자락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커튼 자체가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트롱프뢰유가 추구하는 극한의 사실적 화풍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림의 한계를 벗어나 사실에 가깝고 끝내는 진실이 되고자 했던 트롱프뢰유의 예술 지향점은 진실 추구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예술과 닮아 있는 우리의 삶에도 진실 추구가 절대 진리인 곳이 있다. 바로 법원이다. 개인, 집단, 회사, 정당 간의 다툼 등 모든 다툼이 법정분쟁으로 이어지면 자신의 주장이 진실이며 상대의 진실은 허구라고 주장하게 된다. 때로는 사실 속에 허구가 숨어 있고, 허구인데도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주장하며, 진실이면서도 거짓보다 더 모호한 경우가 있고 거짓인데도 진실로 포장되어 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재판이 있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로 불리는 고유정 사건으로 진실공방이 치열하다. 재판정에 선 고유정은 계획적 살인을 부인하고 우발적 범행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 고유정이 의붓아들을 살해했다고 경찰이 결론 내리면서 사건은 2막으로 흐르고 있다. 검찰이 기소하면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통해 진실이 가려지게 된다.

판사는 양측의 진술과 의견을 듣고 그 가운데 거짓을 파악하고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어떤 선입관도 없어야 하며 법과 신의성실, 정의에 따라 엄정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진실을 가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재판정에서는 진실이 오염되고 왜곡되기도 한다. 저마다의 주장과 거짓이 난무하는 속에서 진실만을 가려내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대법원 중앙홀에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눈을 부릅뜬 채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조국 전 장관 사건도 누구는 개혁을 거부한 정치 검찰이 벌인 적폐 수사로 말한다. 다른 누구는 자녀 입학부정과 가족의 펀드부정 투자 의혹에 대한 당연한 수사로 이야기한다. 진실은 곁에 있지만 또 한없이 돌아가야 알 수 있기도 하다. 

사법부에는 늘 무거운 짐이 지워진다. 진실은 무엇인지, 진실이라고 판단한 것이 옳고 맞은 것인지, 누구도 정답을 내기 쉽지 않은 길을 가야한다. 다만 사법부가 진실을 가리는 과정에는 어떤 주관적인 가치 개입도 왜곡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 진실의 순수성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결한다는 말이 무겁게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사회부 법조팀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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