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판사와 인간, 그 사이의 판결

안채원 기자 2019.10.28 09:32
"판결문을 많이 보세요"

법원에 출입하게 된 후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이다. 판결문 속엔 사건의 경위가 상세히 적혀있다. 사건 내용뿐만이 아니다. 판사가 가진 시각은 무엇인지, 판결에 어떤 의미를 담으려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어떤 판결문에선 판사의 고뇌가 유독 적나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16일 선고된 일명 '신림동 CCTV 남성 사건'이 그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연학)는 한 여성의 뒤를 쫓아 집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한 조모씨에게 주거침입은 인정하되 강간미수는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기소 당시부터 강간미수 혐의 적용을 두고 논란이 됐던 사건이다. 

강간미수가 인정되려면 그가 강간을 하고자 했다는 의도가 명확히 증명돼야 한다. 재판부는 그 증명이 부족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 살인, 금품 갈취 등 목적으로 주거지를 침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강간 목적이 있었다고 특정해 처벌하긴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범행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범죄 중 하나를 단지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해 처벌한다면 그 자체로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에서 강간미수 혐의를 인정하게 된다면 다른 모든 사건에서도 각종 미수 혐의를 인정해야 할 것을 우려한 결과다.

그러면서도 주거침입죄만을 인정한 것치곤 무거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보통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판부는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행으로 선량한 시민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법조계가 이번 판결에 주목한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법적 해석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피해자의 피해에 공감한 판결이었다. 

법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적용될수록 빛을 발한다. 법의 적용과 해석이 넓어질수록 억울한 사람이 생길 확률은 높아지고, 법관의 권력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법적 해석에 명확히 선을 그으면서도 범죄의 중함에 따라 적절한 형벌을 내리는 판결. 판사로서의 품격과 인간으로서의 품격 모두를 지킨 판결이야말로 훌륭한 판결이 아닐까. 법복을 입는 자라면 '판사의 이성'과 '인간의 공감능력'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을 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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