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호의법정필담]직권남용죄, 미처 못다한 이야기

이미호 기자 2020.02.22 08:00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주도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 이어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까지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검찰의 직권남용죄 기소 논리가 법원에 와서 깨지고 있는 형국이다. 대법원은 하급자에게 지시한 일이 '의무 없는 일'이 맞는지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했지만, 법조계는 근본적으로 직권남용죄 '기소 대상'을 바라보는 검찰과 법원의 논리구조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무죄 판결의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특이한(?) 검찰의 기소 구조


'김기춘 블랙리스트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당시 김 전 비서실장의 지위는? 그는 문화계 지원 업무를 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실무라인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관계부서의 실장이나 국장, 과장이 아니었다.

김 전 비서실장이 문화부 공무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단체 지원하는 걸 다시 고려해봐라." 이 얘기를 들은 실·국장이나 과장이 (김 전 비서실장의 지위에 눌려 겁을 먹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고 실제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누가될까?

당연히 지원을 받지 못한 문화예술계 단체(국민)다. 그럼 직권남용죄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누구로 봐야 할까. 김 전 비서실장일까, 문화부 담당 공무원들일까. 검찰의 기소 논리대로라면 주범은 김 전 비서실장이다.

하지만 법원의 시각은 다르다. (문화예술계 단체에) 실무적으로 불이익을 준 사람, 즉 행위를 한 사람은 문화부 공무원들이라고 본다. 이처럼 기소 대상을 바라보는 검찰과 법원의 시각에 큰 괴리가 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의 딜레마


검찰이 김 전 비서실장을 기소할게 아니라 실국장 등 공무원들을 기소했어야 했다는게 법원쪽의 논리다. 강요죄나 혹은 징계 등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야 했다(해당 혐의가 적용이 될지 안될지는 별개의 문제니 접어두기로 한다). 김 전 비서실장에겐 사실상 남용할 직권이 없는데 검찰은 직권이 있다고 해석을 했다는 점에서, 법원쪽에선 '시작부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당 사건과 관련이 없는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공범인 사람이 마치 피해자처럼 돼 있다"면서 "검찰이 기소 자체를 잘못한거다. 직권남용 기소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블랙리스트 판결 당시에도 이러한 의견이 있었다.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에서 "직권남용의 최종행위를 기소하지 않고 과정의 행위(명단송부, 진행상황 보고, 지원배제 방침 전달)만 기소해, 직권남용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전부 지도록 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직권남용은 의사나 동기만으로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법상 미수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고 했다. 검찰이 과정의 행위만 기소했기때문에 필연적으로 김 전 비서실장이 무죄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취지다.

김 전 비서실장 편을 들자는게 아니다. 검찰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비판을 받는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할때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거 정부에 대한 적폐청산이라는 대전제가 있는 상황에서 당시 검찰 입장에선 소위 윗선들을 기소하는게 마땅했다. 여기에 검찰의 딜레마가 있다.
정부세종청사에서 공무원들이 출근하고 있는 모습.




직권남용죄, 엄격한 해석이 국민에겐 이득(?)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직권남용을 폭넓게 해석해 김 전 비서실장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김 전 비서실장의 지시를 전달받은 공무원들은 어떨까.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조심해야 하는 극도로 경직된 분위기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공무원 조직이 경직되면 규제 강화, 투자 부진, 소비 위축 등 결국 일반 국민들의 경제활동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결국 검찰이 공무원들에게만 적용되는 직권남용죄 기소에 보다 신중해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기소대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특정화하고, 하급자들이 움직이도록 했다는 지시의 구체성을 진술을 포함한 여러 증거로 보완하는 작업이 강화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한 수사'라는 오명을 벗긴 힘들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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