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동안 딱 이틀 쉰, 20대 용접공의 죽음

[이주의 판결] 서울고법, 1심 뒤집고 산재 인정

안채원 기자 2020.05.23 07:10
삽화=이지혜 디자인 기자

임종철 디자이너 / 사진=임종철 디자이너


"한 달 동안 야간, 주말 근무를 해야 해. 배관사가 추가로 용접사 구하는 거 거절했어. 몸이 좋지 않은데도 일이 너무 많아서 회사에 쉰다고 말할 수도 없어. 다음주 쉰다고 하면 엄청 뭐라 할 거 같아. 저저번주에도 몸살이 났는데…"

친동생에게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형은 이 카카오톡을 보낸 다음날 숨졌다.

입사 두 달 째던 28세 남성 용접공 A씨의 갑작스런 죽음. 별다른 기저 질환도 가지고 있지 않던 그였다. 부검 결과, 심근염이 사망 원인으로 나왔다.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냈다. 유족들은 "A씨의 업무는 배관사가 설계도면에 따라 파이프를 절단한 후 전달하면 최종적으로 용접하는 것인데, 배관사가 없는 휴일이나 야간에도 혼자 근무하면서 모든 공정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A씨 회사 배관팀의 업무량은 당시 급격히 증가한 상태였는데 A씨는 배관팀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용접사였고, 기숙사에 산다는 이유로 사망 직전 1주 동안 70시간을 근무하는 등 과로에 시달렸다"며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가 A씨의 심근염을 자연적인 경과 이상으로 악화시켰다"고 했다.

또 A씨의 근무 환경 자체가 여러 유해가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공단 측은 A씨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건은 결국 법원으로 갔다. 그러나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도 유족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은 "A씨 사인인 심근염이 그가 수행하던 업무로 인해 발생했다거나 그 업무로 인해 급격히 악화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심근염은 박테리아 또는 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회사 작업장 내에서 심근염이 발생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A씨의 근무시간은 지나치게 많은 수준이라고 보인다"면서도 "건장한 남성으로서 특별히 앓고 있는 질병이 없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던 A씨가 느꼈을 신체적 피로나 정신적 부담은 병을 급격히 악화시킬 만큼의 수준이라고 보긴 부족하다"고 봤다.

그런데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3부(부장판사 이상주)가 지난 14일 이 판단을 뒤집었다. A씨의 산재를 인정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담당한 용접업무는 육체적 강도가 높았고, 고가의 자재를 다루면서 촉박한 납기일을 맞춰야 해 정신적 긴장도 높았다"며 "기존 업무 인원이 상당수 감원된 데다가 주로 A씨에게 업무가 몰려 A씨는 수시로 야간, 주말 근무를 하거나 갑작스러운 업무지시를 받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회사에서는 용접사를 추가로 채용하려 했는데 배관팀장이 이를 거절해 A씨가 충격을 받기도 했다"면서 "입사 이후 9주간 근무하며 A씨는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괴로워했고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 A씨는 사망하기 전 5주 동안 휴일이 2일에 불과했으며 사망하기 전 12일 동안은 휴일 없이 연속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사망 전 3일은 각각 10시간30분, 15시간24분, 12시간48분을 근무했다.

재판부는 "A씨는 사망하기 약 2주 전 상세 불명의 급성 기관지염을 진료받았고 사망 전 10일 전쯤 감기몸살과 복통 증세를 호소했다"며 "이는 면역력 저하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A씨는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무리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바이러스의 활성이 촉진·악화돼 심근염 증상을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며 "A씨의 사망과 업무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유족 측을 대리한 손익찬 변호사는 "기존에 법원은 근로자의 업무적 과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될 수 있는 질환으로 대부분 뇌혈관이나 심장혈관 질병들만 인정해왔다"며 "이번 판결은 업무 부담이 실제로 과도했다면 뇌혈관이나 심장혈관 관련 질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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