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악몽' 되살린 文정부의 '다중대표소송' 추진

[다중대표소송 톺아보기](종합)소수주주 권리 고려하면 보완 필요하지만 전 세계 유례없는 규제 완화 추진

임찬영 기자김종훈 기자 2020.09.21 08:44


재계에 '엘리엇 악몽' 되살린 文정부의 '이것'


삼성이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법정다툼 2차전에서 또다시 승리한 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삼성물산 사옥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KCC를 상대로 낸 '삼성물산 자사주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이날 기각했다. 2015.7.7/뉴스1


9월 국회를 앞두고 정부가 제출한 상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상법 개정안에 포함된 다중대표소송제도 등이 도입될 경우 무분별한 소송과 외국 투기자본의 침입으로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는 게 반대측의 우려다. 재계는 우리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소송전에 휘말리면서 '경제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다중대표소송이 뭐길래

19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번 상법 개정안의 골자는 △감사위원 분리선임 △3% 의결권 제한규정 △다중대표소송제도 신설 등이다. 이 중 '감사위원 분리선임'과 함께 가장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 다중대표소송제도다.

다중대표소송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주주대표소송을 알아야 한다. 주주대표소송은 상법 제403조 제1항에 규정돼 있는데, 조문은 다음과 같다.

제403조(주주의 대표소송) ①발행주식의 총수의 100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는 회사에 대하여 이사의 책임을 추궁할 소의 제기를 청구할 수 있다. (중략)
③회사가 전항의 청구를 받은 날로부터 30일내에 소를 제기하지 아니한 때에는 제1항의 주주는 즉시 회사를 위하여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이사가 불법행위를 저질러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 경우 잘못을 추궁할 1차 당사자는 회사다. 그런데 회사와 이사가 가까운 사이인 경우가 많고, 웬만한 불법행위는 눈감고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경우 주주가 대신 나서 이사의 불법행위를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가 대표소송이다.

이 대표소송이 하나의 회사 내에서 이뤄지면 단일대표소송, 또는 단순대표소송이라 부른다. A라는 회사의 이사가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A사가 이를 방관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때 A사 주주들이 회사에 끼친 손해를 보전하라며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 단순대표소송이 된다. 위 상법 조문은 이 단순대표소송을 규정한 것이다.

이 단순대표소송이 자회사, 손자회사로 확대되면 다중대표소송이 된다. 위의 A사가 B라는 모회사의 지배를 받는 자회사라고 해보자. B사도 A사의 주주이므로 A사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B사도 대표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방관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모자회사 경영진과 이사들이 특수한 관계로 얽혀있는 우리나라 재벌그룹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런 경우 B사 주주들이라도 나서 A사 이사를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다중대표소송제도의 취지다. 현 여당은 경제민주화 구호 아래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을 줄기차게 주장해왔지만 재계와 법조계의 반대에 막혀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가 입법을 주도하고 177석을 확보한 '슈퍼 여당'이 밀어주는 상황이라 국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높다.





'엘리엇 악몽' 되살아나는 재계 "우리 기업이 투기세력 놀이터 될 것"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올라온 정부 안에 따르면 모회사 발행주식총수의 1%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자회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경영리스크만 키울 것이라면서 반대하고 있다.

재계는 우리나라 기업이 해외 투기세력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2015년 합병 전 삼성물산 지분 7.12%를 들고 시장을 흔들었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을 예로 들고 있다. 엘리엇은 소송전 등을 벌이는 식으로 주가를 부양한 뒤 막대한 시세차익을 취하고 빠지는 '먹튀'로 악명 높은 곳이다.

다중대표소송제도는 엘리엇 같은 투기세력이 시세차익을 취하는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특히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라는 정치권 요구에 따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들이 된서리를 맞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지주회사 지분 1%만 투기세력에게 넘어가도 피지배 계열사 전체가 투기세력의 소송전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재계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소송을 통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묻고자 하는 대상은 회사가 아니라 이사 개인이기 때문에 회사, 나아가 그룹이 위험이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엘리엇 같은 투기세력에게 악용될 가능성 역시 낮다는 반박도 있다. 대표소송으로 우리 기업을 흔들겠다면 지금 상법에 마련된 단일대표소송으로도 가능한데, 그런 사례는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으므로 다중대표소송이 투기세력의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없다는 취지다.



정부 추진 다중대표소송 졸속입법 될라…"국제기준 미달"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주최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실상과 재벌정책(엘리엇, 삼성분쟁이 주는 교훈)토론회가 25일 서울 종로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2015.6.25/뉴스1


정부와 여당이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다중대표소송제도는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형태라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재계의 우려처럼 경제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충분한 법안이라는 취지다. 반면 소수주주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한다면 도입해야 하는 제도라는 입장도 있다.

기업 협박 수단으로 전락 가능성…이사진 피소 가능성↑

모회사 지분 1%만 보유하면 즉시 자회사에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자는 정부의 상법 개정안에 대해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권 원장은 대표소송 분야만 20년 넘게 연구한 권위자다.

권 원장은 다중대표소송제도가 없어도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의 잘못을 추궁할 수단은 이미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모회사 이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모회사가 자회사 이사의 잘못에 대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모회사 주주가 아니더라도 은행 같은 채권자들이 책임 추궁에 나설 수도 있다.

권 원장은 다중대표소송이 도입되면 기업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권 원장은 "소송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사의 평판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며 "소송이 대법원까지 가서 끝나려면 5년 정도 잡는데 그때까지 그 사람은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다. 최종 판결을 통해 혐의를 벗는다 해도 생계가 거덜나면 아무 쓸모 없다.

자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소송에 엮였다는 사실이 경영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적대적 투자자가 이사 선임에 간섭하는 등 경영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 권 원장의 설명이다. 애초에 이사가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경영 상의 실수는 언제든 불법행위로 문제시될 수 있기 때문에 이사와 회사는 항상 소송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찬성론 "경영투명성 확보, 소수주주 권리보장 고려하면 도입 필요"

그러나 이런 평가는 재계가 주장하는 다중대표소송의 위험성만 부각하고 공익성은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대표소송 수행 경험이 많은 전영준 변호사(법무법인 넥스트)는 다중대표소송이 도입되면 이사를 감시하는 눈이 많아져 경영이 보다 투명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펀드시장 환매 중단 사태를 예로 들면서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됐다면 금융지주사의 주주들이 은행을 제대로 감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전 변호사는 다중대표소송제도가 소수주주의 권리행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 상법에 마련된 단일대표소송은 자회사 주식을 모회사 주식으로 바꿔주는 포괄적 주식교환을 하면 무력화된다는 한계가 있다. 자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들을 상대로 제기하는 것이 단일대표소송인데, 주식교환을 받은 주주는 자회사 주주 지위를 잃고 모회사 주주가 되므로 대표소송은 각하 판결된다.

실제로 현대증권 매각 당시 소수주주들이 경영진의 자사주 헐값 매각에 반발해 제기한 대표소송이 이런 식으로 무력화된 바 있다. 현대증권의 모회사였던 KB금융지주가 포괄적 주식교환에 나서면서 소수주주들의 소송은 각하로 종결됐다.(2017다279326)

정부안, 다중대표소송 국제기준 미달…"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다"





제도 도입을 반대하는 쪽에서도 현재 제도에 이런 한계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반대하는 것은 정부가 국제기준에 동떨어진 방식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중대표소송은 미국과 일본에서 먼저 도입됐다. 미국은 모자회사가 100% 지배관계거나 경영진이 아예 같아 사실상 하나의 회사로 봐도 무방한 상태에서만 다중대표소송을 인정한다. 여기에 주주들을 적절하게 대표하는 주주만 대표소송에 나설 수 있다는 대표적절성을 요건으로 두고 있다.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주주들이 대표소송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손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요건이다. 또 미국은 경영 상의 실수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우리나라보다 넓게 인정해주고 있어 상대적으로 소송 위험이 적다.

일본은 최종완전모자회사 관계에서만 다중대표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최종완전모자회사는 모자회사가 100% 지배관계이고 모회사를 100% 지배하는 또 다른 모회사가 없는 관계를 뜻한다. 추가로 자회사가 차지하는 입지를 따져봤을 때 모회사에게 '중요한 자회사'여야 대표소송이 가능하다. 아울러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하거나 모회사에 손해가 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대표소송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문도 있다. 소송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정부 안은 소송 요건을 미국, 일본보다 절반 이상 완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 안은 일본 제도를 본따면서, 모회사가 자회사를 100% 지배하는 경우에만 소송이 가능하다거나 중요 자회사가 아니면 소송 제기가 불가능하다는 제한은 빼고 제도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권 원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완화된 것"이라며 "도입하려면 최소한 국제적 표준에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일본처럼 제한을 두면 실제로 활용할 경우가 거의 없어 제도를 도입해도 유명무실해질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일본에서도 다중대표소송이 공익소송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소송 요건을 완화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공유하기

1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