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처가 덕보려다 망친 결혼…남편 이혼청구 될까

[친절한 판례씨] 대법 "이미 혼인 파탄난 경우 원고 책임이 더 무겁지 않는 한 이혼 청구 인용돼야"

김종훈 기자 2019.03.04 05:00

우리 법원은 이혼에 있어서 유책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유책주의는 배우자 중 한쪽이 배우자로서 의무에 명백히 위반되는 부정한 행위를 한때 상대방이 문제의 배우자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때 부정한 행위를 한 문제의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

가정폭력이나 외도처럼 한 쪽의 잘못이 분명한 경우라면 이혼 소송에서 다툴 거리가 많지 않다. 그러나 딱히 누가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 않거나 둘 다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면 긴 법정다툼을 거쳐야 할 수 있다. 그동안 상대방 탓만 하고 자기 책임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갈등의 골이 깊어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혼인생활이 파탄나기도 한다. 파탄주의는 이런 경우 누구의 잘못인지 묻지 않고 이혼을 허용하는 제도다.

우리 법원은 유책주의가 원칙이지만 파탄주의도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처가 덕 보고 편히 살려다 결혼생활이 꼬여버린 A씨의 사건(94므130)이 그 예다.

A씨는 원래 처가에서 경제적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처가가 그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B씨는 남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몰래 남에게 돈을 빌렸고, 처가에서 준 것처럼 남편에게 빌린 돈을 건넸다. B씨는 이런 식으로 4000만원이 넘는 돈을 빌려 남편에게 1900만원을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썼다.

빚 독촉이 들어오면서 B씨의 거짓말은 머지않아 들통났다. 뒤늦게 사실을 안 A씨는 B씨를 폭행한 뒤 검찰에 고소했다. A씨는 일단 전세보증금을 빼다 일부 빚을 갚고, B씨에게 100만원을 쥐여준 뒤 다섯 살배기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내보냈다. 이때 B씨는 임신 6개월째였다.

B씨는 셋방을 얻어 혼자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A씨를 찾아가 생활비를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B씨는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혼자 살게 됐다. 이후 A씨는 결혼 생활이 파탄 난 것은 B씨 책임이라며 법원에 이혼 소송을 냈다.

하급심은 A씨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B씨 때문에 결혼 생활이 파탄 났다는 A씨 주장은 사실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책주의에 따라 이혼하려면 배우자 한 쪽이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과 상대방의 이혼 청구가 있었다는 것 모두 인정돼야 한다. 하급심은 이 조건이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A씨의 이혼 청구는 더 판단할 것 없이 기각하는 게 맞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런 경우 예외적으로 파탄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사실관계에 의하면 A씨와 B씨의 혼인은 이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며 "민법 제840조 제6호의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민법 제840조는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를 설명해놓은 조항으로, A씨와 B씨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 상황만 놓고 봤을 때 이혼을 청구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혼인관계가 파탄이 이르렀음이 인정되는 경우 원고의 책임이 피고의 책임보다 더 무겁다고 인정되지 않는 한 원고의 이혼 청구는 인용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회복하기 어려운 정도로 혼인이 파탄났고, 서로 잘못이 엇비슷한 상태에서 이혼 청구가 있었거나 책임이 더 적은 배우자의 이혼 청구가 있었다면 이혼이 가능하단 뜻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회복하기 어려운 정도로 혼인이 파탄났어도 파탄의 책임이 더 큰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점에서는 대법원이 파탄주의를 인정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유책주의의 틀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은 이 같은 판단을 근거로 A씨의 이혼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상황을 봤을 때 A씨 잘못이 더 크므로 A씨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 B씨도 이혼 의사가 있는지 명백히 알 수 없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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