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X테크]①"내 변호사는 AI"…인공지능 어디까지 왔을까

[the L리포트]美 판례·문서 분석에서 소송까지…한국은 아직 '걸음마' 중

박보희 기자 2016.09.14 04:21

장면 하나. "승소 가능성 92%입니다" 김지능 변호사가 의뢰인이 보내온 사건 정보를 프로그램에 입력하자, 프로그램은 관련 판례 정보와 함께 이를 기반으로 승소가능성까지 확인해 알려줬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20만여장에 달하는 문서에서 의뢰인에게 유리한 증거와 불리한 증거까지 검색하는 것은 물론 각 정보가 소송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까지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소가능성을 확인한 의뢰인은 소송을 결정했다. 의뢰인의 결정에 김 변호사는 소장작성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프로그램은 이미 입력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소장을 작성했다. 예전 같았으면 문서와 판례 검토에만 변호사 서너명이 달라붙어 몇주일이 걸렸을 지 모르는 일이지만, 판례와 문서 검토, 소장작성과 제출까지 걸린 시간은 이삼일 남짓. 앞으로 재판 진행 상황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후에는 재판이 있다. 김 변호사는 법원에 출석하는 대신 사무실 한쪽 벽면의 스크린을 켰다. 원격영상재판이 일상화되면서 법원보다 사무실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익숙하다. 판사와 변호사, 증인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재판에 참석했다.

장면 둘. 스타트업을 시작한 이스타씨. 넉넉하지 않은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했기때문에 각종 계약서와 법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예전같았으면 로펌을 찾아 비싼 비용을 들여 법률 자문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사무실에서 혼자서 일처리를 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인공지능 프로그램 덕분이다.

스타트업 법률지원 프로그램에 회사 정보 등을 입력하면 어떤 서류가 필요하고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담긴 '맞춤형 서류 패키지' 목록을 바로 받아볼 수 있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계약서 검토 프로그램에 계약서 내용을 스캔해 입력하면 프로그램은 다른 수십만건의 계약서와 비교해 부족하거나 빠진 내용,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 자동으로 표시를 해준다. 이밖에 법률적 질문이 있다면 법률 질의응답 프로그램으로 즉시 전문적인 답변을 받아볼 수 있다.

스타트업 초기 동업자와 투자자금을 두고 분쟁이 있기도 했지만, 역시 스스로 해결했다. 법률 의견서를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법적 효력이 있는 변호사의 의견서를 받아 손해배상청구 전자소송을 제기했다. 소액 소송이라 인공지능 판사가 재판을 진행해 한 달만에 손해본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리걸테크. 법과 테크놀로지의 합성어인 리걸테크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법률 정보 기술을 말한다. 금융과 기술을 합친 핀테크의 법률 버전 쯤으로 볼 수 있다.

법률분야는 인공지능을 적용하기 가장 적합한 분야로 꼽힌다. 일본 마쓰오 유타카 도쿄대 교수는 저서 '인공지능과 딥러닝'에서 "인공지능으로 가장 빨리 쉽게 변할 것으로 예측되는 분야는 법률"이라며 "클라이언트의 정보를 정리하거나 관련 법령을 체크하고 과거의 판례를 조사하는 등의 업무에서 인공지능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고 봤다.

실제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가상의 상황이지만, 이중 일부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미국 리걸테크 업체만 1100여개…판례분석에서 의견서 작성까지

국내에서 리걸테크는 아직 생소한 용어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본격적으로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있다. 조근호 행복마루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장규모가 커지기 시작해 현재는 관련 회사만 1100개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초기 리걸테크는 판례 수집 등 리서치와 문서증거 분석 등 방대한 양의 정보 처리 기술 개발이 주를 이뤘다. 지난 5월 미국의 파산전문 대형 로펌 베이커앤호스테틀러가 채용해 화제가 됐던 인공지능(AI)변호사 로스(ROSS) 또한 이같은 업무를 맡았다. 로스는 기존의 초보 변호사들이 맡아왔던 파산 관련 판례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미국 스텐퍼드대는 로스쿨 내에 '코드엑스(CodeX) 프로젝트 센터'를 설치해 매년 컨퍼런스를 열고 스타트업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5월 열린 컨퍼런스에서는 빈민층을 위한 법률자문 자동 시스템을 비롯해 스타트업 엄체에 종합적인 법률 솔루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업체가 소개됐다. 컨퍼런스에 참여한 김예지씨는 "(초기 기술 개발이 중요한 이슈였다면) 최근에는 기술 자체보다 상품성이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로긱스(LawGeex)는 자동으로 영문 계약서를 검토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계약서를 사진이나 문서 파일로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계약서에 누락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 등을 찾아 자동으로 표시를 해준다. 이미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상품을 공개하고 있다.

스타트업 도큐멘츠(Startup Documents)는 로펌을 고용하기 부담스러운 스타트업 업체들에게 맞춤형 서류 패키지를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스타트업의 내용과 규모 등 관련 정보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필요한 서류를 분석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기 힘든 저소득층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도카셈블(Docassemble)을 이용하면 법률 자문과 함께 공식적인 변호사의 의견서를 얻을 수 있다. 예를들어 폭행 사건의 피해자라면 프로그램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얼마를 합의금으로 받을 수 있고 소송을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지 조언을 받을 수 있다. 또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위자료와 양육비는 얼마를 받을 수 있고 재산 분할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 변호사의 객관적인 의견서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물론 변호사가 아닌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작성한 의견서다.

걸음마 단계 국내 시장…인공지능 판사 나올까

인공지능 변호사를 개발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미국에 비해 국내 리걸테크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 2011년 문을 연 인텔리콘 메타연구소는 지능형 법률정보시스템인 '아이리스(i-LIS)' 개발에 성공해 상품화를 앞두고 있다. 올해 말에서 내년 초까지 베타 서비스를 시장에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능형 법률 정보 시스템'인 아이리스는 판례와 법률 정보 검색과 질의응답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간단한 단어 검색 만으로도 관련 판례와 법령 정보를 찾아낼 수 있고 법률 용어에 사용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법률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아이리스를 개발 중인 임영익 변호사는 "아이리스는 진화 학습 모델로 대법원이 판례를 공개하는 속도에 맞춰 저절로 학습이 된다"며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세상을 이렇게 변화시킬지 몰랐던 것처럼 법률 시장 또한 멀지않은 미래에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법부 또한 변화의 예외는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3월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4차 산업혁명이 오면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업이 판사 등 법조인"이라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사법부가 헌법이 부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창의적·창조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변화에 대한 위기감에 대법원은 지난 4월 사법정보화 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사법정보화 발전위원회는 원격영상재판, 모바일 오피스, 빅데이터를 활용한 사법정책 수립 등을 연구중이다. 예를들어 전자소송 등을 통해 사건이 들어오면 빅데이터를 활용해 지역별로 어떤 사건이 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어느 법원에 판사가 더 필요하고, 어느 분야의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등 전망을 세우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또 원격영상재판을 활용하면 서울에 살고있는 증인이나 전문감정인 등이 재판이 열리는 지방까지 가지 않더라도 재판에 참석할 수 있다. 또 각종 형사재판에서 현장에 직접 출석하기 어려운 증인을 보호하는 방안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그만큼 재판의 객관성과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김형두 사법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먼 미래의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실현이 되는 것 또한 고려해야 한다"며 "다만 5~10년 내 많은 부분이 현실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 판사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잊을만하면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는 등 법조계 신뢰가 바닥인 상황에서 '전화변론'이나 '전관예우'가 통하지 않는 인공지능 판검사가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마쓰오 유타카는 "민사재판 특히 이혼이나 상속으로 옥신각신하는 안건은 정서적인 부분과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며 "소송 당사자의 주장이 법정에서 통할 확율은 15%다 라고 기계가 말하는 것 보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들은 후 납득하고 싶은 의뢰인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국내 상황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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