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과 판결] 이인복 대법관

사회적 약자 구제…민감한 정치 사건 '소수의견' 내기도

황재하 기자 2016.01.11 09:00
이인복 대법관. /사진=뉴스1

이인복 대법관(60·연수원 11기)은 타당성과 법리가 조화된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구제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선고했다. 판결을 주도하기보다 여러 차례 의미 있는 소수의견을 낸 바 있다.

오는 9월 퇴임을 앞둔 이 대법관은 현재 대법관들 중 남은 임기가 가장 짧다. 2010년 9월 첫 여성 대법관인 김영란 대법관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제청자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임명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다음은 이 대법관의 주요 판결.

◇"긴급조치 4호는 위헌·무효"

이 대법관은 2013년 5월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4호가 위헌·무효라는 판결을 이끌었다. 긴급조치 1호는 이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무효 또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긴급조치 4호에 대해서까지 판단한 것이다.

긴급조치 4호는 학생들의 반독재투쟁 운동을 막기 위해 1974년 4월 선포됐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련 단체를 조직하거나 활동에 관여하는 행동은 물론 수업·시험을 거부하거나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모두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거부하면 최고 사형으로 처벌하고 소속 학교는 폐교할 수 있는 강력한 처벌 조항까지 뒀다. 같은 해 8월 해제됐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4호에 대해 "오로지 유신체제를 유지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며 "당시 국내외 정치·사회 상황이 긴급조치권 발동 대상이 되는 비상사태였다고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긴급조치 4호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학문의 자유 등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폐지되기 이전부터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 비춰봐도 위헌·무효"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북한 실생활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긴급조치 4호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2년형을 확정받았다가 재심을 청구한 추모씨(83)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존엄사' 인정

이 대법관이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9부는 2009년 2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는 환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판결을 내렸다. 환자의 자녀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장치를 제거해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라는 원심을 유지한 것이다.

재판부는 헌법상 인격권과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비춰볼 때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공통된 해결 방안을 찾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엄사를 허용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도 자세히 제시했다.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환자의 일시적 판단이 아니라 진지한 의사표현이 인정될 것, 일상적 치료 중단이 아니라 사망 과정으로서 의사에 의해 이뤄질 것 등이다. 자칫 무분별한 치료 중단으로 이어질 것을 막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이 대법관은 당시 판결을 선고하며 무거운 책임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존엄사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 때문에 심적 부담이 컸다"며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 판결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환자의 진지한 의사표현이 있는 경우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내용을 오해하거나 남용하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판결은 같은 해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능환 대법관)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이에 따라 2008년 조직검사를 받다가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채 연명치료를 받아왔던 김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했고, 2010년 1월 세상을 떠났다.

◇한명숙·이석기 사건 소수의견

이 대법관은 주심을 맡거나 캐스팅 보트를 행사해 판결을 주도한 사건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판결에서 낸 소수의견으로 주목받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지난해 8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72)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확정했다. 한 전 총리가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서 돈을 건네받았다고 본 것이다. 수사 단계에서 돈을 건넸다고 주장한 한 전 대표는 재판 과정에서 말을 뒤집어 증언 신빙성을 의심받았고, 이에 따라 1심은 한 전 총리에게 무죄, 2심은 유죄를 각각 선고했다.

이 대법관은 객관적 증거가 있는 3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까지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한 전 총리의 혐의 액수인 총 9억원 가운데 6억원은 무죄 취지로 판결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대법관은 한 전 대표의 법정 증언을 뒤집고 수사 기관에서 한 말을 사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해 1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선동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9년을 선고한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 판결에서도 이 대법관의 의견은 소수에 속했다.

이 대법관은 "이 전 의원이 선동한 것은 국지적 파괴행위에 불과해 폭동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며 내란선동을 무죄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영철·민일영·고영한·김창석 대법관이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까지 유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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