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과 판결] 양승태 대법원장

황재하 기자 2016.01.08 10:00

양승태 대법원장(68·연수원 2기)은 국가안보나 노동, 시위 사건에서는 보수적이지만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받는다.

양 대법원장은 2005년 2월 최종영 전 대법원장이 제청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임명으로 처음 대법관 자리를 맡았다. 2011년 2월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7개월 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15대 대법원장에 올랐다.

다음은 양 대법원장의 주요 판결들.

◇ 에버랜드 배임죄 무죄 이끄는 캐스팅 보트 행사

김능환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는 2009년 5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과 관련한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건을 심리했다. 심리에 참여한 나머지 대법관 10명이 5대5로 팽팽히 갈린 가운데 당시 대법관이었던 양 대법원장은 별개 의견을 내 무죄 판결을 이끌었다.

허태학·박노빈 전 에버랜드 대표이사는 1996년 에버랜드 CB를 적정가보다 낮은 값으로 발행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대지분을 확보하도록 하고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기소됐다. 1심과 2심은 모두 허씨와 박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관의 의견은 CB 발행이 주주 배정방식인지 제3자 배정방식인지를 둘러싸고 둘로 나뉘었다. 제3자 배정방식이라면 배임죄가 유죄, 주주 배정방식이라면 무죄라는 데는 같은 의견이었다. 당시 주주였던 회사들이 스스로 CB 발행에 관여한 이상 기존 주주들의 부(富)가 새 주주에게 넘어갔더라도 이는 기존 주주들의 선택이라고 본 것이다.

반면 양 대법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CB 발행 방식과는 무관하게 배임죄가 무죄라는 의견을 냈다. 발행 조건에서 주주에게 불이익이나 손해가 발생했더라도 회사에 대한 임무를 위배하지 않은 한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양 대법원장의 뜻대로 사건은 무죄 판결한 원심대로 확정됐다. 1996년 10월 이후 13년 동안 지속된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과정을 둘러싼 불법 의혹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었다.

◇ "실제로 위협 느끼지 않았어도 협박죄 유죄" 기준 정립

양 대법원장은 '누군가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할 만한 행동을 했다면 상대가 실제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더라도 협박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양 대법원장이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는 2007년 협박 협의로 기소된 경찰관 조모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조씨는 2003년 5월 지인의 부탁으로 채무자 A씨에게 전화해 "돈을 빨리 갚지 않으면 상부(경찰서 정보과)에 보고해 문제삼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이후 사기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씨가 A씨에게 전화를 할 당시까지만 해도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A씨는 조씨의 재판에 출석해 "조씨의 말에 겁을 먹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에 조씨의 변호인은 A씨가 겁을 먹지 않았던 만큼 협박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전원합의체는 협박죄가 성립하려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하지만 실제 상대가 공포심을 느끼는 것까지 요구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피해자가 정서적 반응이나 감정상태를 떠올린다 해도 공포심를 느꼈는지 여부와 판단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고 객관적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실제 공포심을 느꼈는지 여부에 따라 유무죄가 엇갈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 "평가방식 갑자기 바꾼 것은 잘못"…변리사 시험 불합격자 구제

양 대법원장은 또 2006년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갑자기 법을 개정한 행정부의 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변리사 1차 시험에 응시했다가 불합격 처리된 이들이 "평가방식을 갑자기 변경하는 바람에 떨어진 만큼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야 한다"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한 것이다.

특허청은 2000년 6월 변리사 1차 시험을 2002년 1월부터 상대평가제에서 절대평가제로 전환한다고 공지했지만 정작 시기가 다가오자 상대평가제로 다시 변경한다고 공고한 뒤 2002년 3월 변리사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개정된 법령은 즉시 시행됐고, 절대평가 합격선을 넘었지만 변경된 법령에 따라 상대평가 합격선을 넘지 못해 불합격한 이들은 소송을 냈다.

전원합의체는 특허청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신뢰를 저버렸다며 수험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절대평가제를 도입한다고 해 놓고 시험이 임박하자 다시 상대평가제로 돌이킨다는 내용으로 시행령을 개정한 것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조치'라고 본 것이다.

아울러 "합리적이고 정당한 신뢰에 따라 절대평가제가 요구하는 합격 기준에 맞춰 시험준비를 한 수험생들은 1차시험을 불과 2개월 남겨둔 시점에 시행령이 갑자기 변경·시행됐다"며 "헌법상 신뢰보호에 비춰 허용할 수 없는 만큼 무효"라고 설명했다.

◇ 대법원 소부에서 보수적 판결 잇달아 내놔

양 대법원장이 보수적이라는 평가 중 상당 부분은 그가 소부 주심으로서 내놓은 판결들 때문이다. 그가 주심을 맡은 대법원 2부는 2009년 12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집회 과정에서 경찰버스를 파손한 데 대해 손해배상 책임 100%를 적용하라고 판결했다.

민주노총은 2007년 6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서 '특수고용노동자 노동 3권 쟁취 결의대회'를 열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버스가 파손됐다. 정부는 민주노총이 이를 배상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2심 재판부는 민주노총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질서유지 조치를 취한 점을 인정해 책임을 60%로 제한해야 한다고 봤지만, 양 대법원장이 이끈 대법원 소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뒤늦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지만 손해가 발생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 책임을 제한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같은 재판부는 용산참사 당시 불을 내 경찰관을 숨지게 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로 기소된 철거민 9명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로써 철거민 7명은 실형을 확정받았다. 재판부는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났다고 본 원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양 대법원장은 또 대법원 2부 주심을 맡아 증권선물거래소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한 혐의(공동주거침입)로 기소된 코스콤 비정규지부 노조원과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간부들에게 유죄 취지 판결을 내렸다. 하급심은 모두 노조의 점거농성이 정당한 쟁의행위라고 봤지만, 양 대법원장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정당한 쟁의행위로 평가할 여지가 있더라도 승낙 없이 침입·점거한 이상 정당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단순 참여한 보수적 판결, 양승태 대법원장이 주도한 것처럼 왜곡

양 대법원장이 판결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보수적 판결들은 사실 주심이나 재판장으로서 주도했다기보다 단순히 동의하는 입장을 냈던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2009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사건을 유죄로 인정한 판결이다. 한청은 2002년 이후 이적단체 논란에 휩싸인 단체다. 당시 대법원 2부(주심 박일환 대법관)는 "한청은 진보단체들의 연합체"라는 변호인 측 주장을 배척하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판결은 양 대법원장이 2011년 대법원장으로 지목되자 마치 그가 주도적으로 판결을 내린 것처럼 조명받았지만, 실제로는 소부에 소속된 다른 대법관들과 동일한 의견을 내놓으며 상고를 기각한 판결이었다. 양 대법원장이 판결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된 판결 중 하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인권 문제 있어서만큼은 진보 성향 행보 주목

재계 친화적 판결이나 집회·시위에 엄격한 판단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양 대법원장이지만 인권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판사나 대법관들보다 앞서 나가는 면모를 보인 바 있다.

양 대법원장은 2001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으로 근무하던 중 남성 우위의 호주제도를 규정한 민법에 대해 최초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며 주목받았다. 결국 헌재는 6대3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아내가 남편의 집에 입적하고,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도록 규정한 호주제가 이유 없이 양성을 차별하는 제도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 양 대법원장은 2005년 전원합의체(주심 고현철·유지담 대법관)가 여성도 성년이 되면 당연히 종중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판결하는 데 참여한 바 있다.

양 대법원장을 비롯한 당시 대법관들은 전원일치 의견으로 "종원 자격을 성년 남자로만 제한하고 여성에게 종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우리의 전체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판결은 아니지만 양 대법원장은 2005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사형제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폐지됐으면 하지만 국민 여론이 아직 컨센서스(합의)를 이루지 않았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폐지되기 전이었던 간통죄에 대해서도 "큰 타당성이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 바람 피운 배우자의 이혼 청구 금지한 '유책주의' 유지

최근 양 대법원장이 영향을 미친 판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바람을 피운 배우자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책주의'를 유지한 것이다.

우리 민법은 유책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사실상 혼인이 파탄났다면 배우자 중 누구든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파탄주의'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지난해 이에 대해 다시금 판단했지만 대법관들의 의견이 7대6으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기존 유책주의가 유지됐다.

말석부터 의견을 밝히는 전원합의체에서 양 대법원장이 의견을 내기 전까지 대법관들의 판단은 6대6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었다. 양 대법원장은 캐스팅 보트를 유책주의 쪽에 행사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헌법재판소가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만큼 가정을 보호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의견에 힘을 실었다.

공유하기

1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