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성향 파악' 문건 다수 발견…'블랙리스트'는 확인 안돼

(종합) 원세훈 전 국정원장 형사사건 관련 재판부 동향 파악하기도…인사상 불이익 여부는 조사 범위 밖

송민경 (변호사) 기자 2018.01.22 16:10
/사진=뉴스1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중 사법부가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해 문서로 작성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또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등 특정 재판에 대한 민감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사법부 독립성 침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문건들을 토대로 '블랙리스트 실행'으로 볼 수 있는 승진 등 인사상의 불이익이 이뤄졌는지 여부는 조사 범위 밖이어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과정에서 특정 성향의 판사들을 원천배제한 것을 '블랙리스트'가 실행된 것으로 볼지 여부를 놓고는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재조사를 맡은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부장판사)는 22일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에 대한 뒷조사 결과와 그에 대한 대응방안 등을 담은 문건을 작성·관리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추가조사위는 지난해 11월 이후 추가조사를 통해 블랙리스트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원행정처 PC의 저장장치를 확보, 최근 물적조사 등을 완료했다.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인사 또는 감찰 부서에 속하지 않는 사법행정 담당자들이 법관의 동향이나 성향 등을 파악해 작성한 문서 가운데 정보 수집의 절차와 수단에 합리성이 인정되지 않고 그 내용이 사법행정상 필요를 넘어 법관의 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다수의 문서가 발견됐다.
그러나 실질적인 '블랙리스트' 성격으로 볼 수 있는 대응방안의 실행 여부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추가조사위 관계자는 "대응방안 실행 여부는 조사범위에 해당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다"며 "블랙리스트 개념에 논란이 있는 만큼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기획제1심의관이 사용하던 컴퓨터 저장매체에선 2015년 2월 작성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이란 문서가 확보됐다. 이 문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불린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사건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에 청와대와 여야 각 당, 언론, 법원 내부의 동향과 반응을 파악해 정리하고 향후 대응 방안을 검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선을 전후해 발생한 국가기관의 정치개입인 국정원 댓글 사건은 당시 박근혜정부의 정통성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관심사안이었다. 

문건은 원 전 국정원장 외 2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정원법 위반 사건의 2심 선고일이었던 2015년 2월9일 다음날 작성됐다. 그러나 당시 심의관은 위 문건을 작성한 바 없고 본 적도 없으며 위 문건의 양식은 행정처가 사용하는 양식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추가조사위는 이 문건에 대해 "법원행정처가 원 전 원장 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에 걸쳐 특정 외부기관과 사이에 특정 재판에 관한 민감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한 정황이 담겨 있다"며 "사법행정권이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됐던 '인사모'(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의 학술대회에 대한 대응 방안 마련과 실행에 대해서도 추가로 5개의 문건이 확인됐다. 기획조정실 심의관들에 의해 회의 자료로 작성한 문건들이다. 이 문건에 중기 대응방안으로 명시된 ‘중복가입 해소조치’는 실제로 실행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추가조사위는 "법관들의 특정 커뮤니티 및 연구 모임과 관련해 이 같은 내용의 부정적인 대책과 견제 방안이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논의된 것만으로도 부적절한 사법행정권의 행사로 봐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법원행정처가 특정 법원의 판사회의 의장 경선과 관련해 출마 예정자의 프로필과 경력 등의 신상 정보를 확인하고 출마 경위와 지원 법관들의 세부 동향까지 파악한 정황도 드러났다. 대응전략으로 다른 판사의 의장 경선 지원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추가조사위는 "대응 방안의 실행이나 성공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부적절한 사법행정권의 행사"라며 "사법행정권의 판사회의에 대한 부당한 개입으로 보여질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사법행정위원회 출범으로 고등법원별로 위원 추천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2016년 3월 작성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라는 제하의 문건을 발견했다. 법원행정처는 이 문건을 통해 다수의 법관들을 경력과 성향 및 활동내용 등에 기초해 특정한 그룹 또는 유형으로 분류한 뒤 일정한 경력을 가진 일부 법관들은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다른 그룹과 유형에 속한 법관들은 원천 배제하는 등의 관련 정보를 추천권자인 각 고등법원장에게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추가조사위는 이 문건과 관련, “추천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며 “개별 법관들을 합리적인 기준도 없이 분류했으며 정치적 성향 등에 관한 내용은 자칫 부정적인 이미지의 낙인을 찍을 우려가 있어 그 자체로도 부적절한 정보”라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법관들의 익명카페, 페이스북 등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및 법원행정처에 호의적인 일명 ‘거점법관’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법관들의 동향과 여론을 파악하고 익명카페의 자진폐쇄 유도방안까지 검토한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문건에 문제 소지가 있는 주요 게시글로 명시된 글들은 상고법원 설치, 원세훈 전 국정원장 형사사건 선고, 쌍용차 해고노동자 판결 선고, 법원 인사 등의 이슈에 관한 법관들의 게시글 및 그에 대한 댓글들인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법원행정처는 특정연구회 소속 법관들을 핵심그룹으로 분류해 그 활동을 자세히 분석하고 이념적 성향과 행태적 특성까지 파악해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추가조사위는 "수단과 방법의 면에서 합리적이라거나 타당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법관의 연구 활동에 대한 사법행정권의 지나친 개입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 추가조사를 놓고 한계도 지적된다. 조사가 특정 검색어를 통해 추출된 문서들만을 대상으로 했고 그 문서 가운데서도 비밀번호를 해제하지 못한 문서들은 제외됐다는 점에서다.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완전히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의 전임인 양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지난해 4월 진보법관들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불거졌다. 퇴임을 앞둔 양 전 대법원장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맡긴 결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의혹은 가라앉지 않았다. 전국법관대표회의(판사회의) 등은 지속적으로 추가조사를 요구했고 결국 지난해 9월 취임한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를 결정, 추가조사위에 권한 일체를 위임했다.

그러나 추가조사위 구성 직후부터 위원들의 성향을 두고 공정성 시비가 일었다. 조사 과정에서 추가조사위의 법원행정처 PC에 대한 강제조사가 타당한지를 놓고도 사법부 내에서 찬반이 갈렸다. 이에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이 김 대법원장을 고발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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