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은 내가 당했는데, 왜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죠?"

[그일, 그 후] "참다가 폭로하니 '돈·정규직 요구했다더라' 소문…재계약 불가 통보까지"

박보희 기자 2018.02.13 05:00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선배 저 회사 못다닐 것 같아요." 

2014년 5월27일, 입사 한 달 밖에 안된 후배와의 통화가 시작이었다. 지상파 방송사에 다니던 화연(가명)씨가 하루 연차를 내고 돌아오니 후배가 출근을 안했다. 전화해 이유를 물어보니 '개인 사정'이라며 말을 아끼던 후배는 전날 직장 선배와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술자리를 마친 후 택시를 잡으러 가던 길에 그가 강제로 입을 맞췄다고 말했다. 화연씨는 짐작가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후배는 맞다고 했다.

◇ "허벅지 손 올리고 엉덩이 만지고…후배도 당하자 문제제기"

화연씨 역시 두 달전 회식 자리에서 같은 사람에게 비슷한 일을 당했다. 화연씨보다 6살 많은 유부남 A선배가 반바지를 입은 화연씨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엉덩이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참고 넘어갈 생각이었어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고 저는 계약직이기도 했고, 회사는 다녀야하는데 말했다가 저만 힘들어질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후배가 또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하니까 상습범이다 싶었어요. 그냥 넘어면 계속 피해자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 얘기도 했어요."

그날 오후, 팀장과 A씨 등을 만나기로 했다는 후배의 연락을 받고 화연씨도 그 자리에 나갔다. A씨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요구한 것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즉각적인 인사조치'였어요. 그런데 A씨의 태도는 사과가 아니었어요. 팀장이 없을 때는 '그런 행동을 해 미안하다'면서도 팀장이 있으면 '술에 취해 기억은 안나는데 기분나빴다면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말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니 더 화가 났어요."

화연씨는 결국 신고를 결심했다. 추행을 목격한 직원들에게 진술서도 받았다. 이들이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에는 "A씨가 옆에 앉아있던 화연씨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는 것을 목격함" "화연씨가 손을 수차례 잡아 빼냈으나 다시 더듬었음" "화연씨는 매우 불쾌해보였음" "허리를 감싸는 등 지속적인 스킨쉽을 함"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화연씨는 반복적으로 자리를 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손짓으로 A씨의 손을 가르켰음" "화연씨는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다리를 계속 만졌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임" 등의 내용이 담겼다.

2014년 6월 초 화연씨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2018년 현재까지 4년을 이어온 소송전이 시작됐다.

◇ "성추행 사실 알리자 '꽃뱀' 취급…재계약 일주일 앞두고 퇴사 통보"

화연씨는 "경찰에 신고하고 재계약이 안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상사가 회사 계속 다닐 거냐고 계속 물어보더라고요.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내가 나가야하죠? 당연히 계속 다니겠다고 했죠. 그런데 재계약 일주일쯤 전에 평가가 안 좋아서 연장할 수 없다고 했어요. 계약직 대부분이 한 차례 계약을 연장해서 2년간 일을 하는데, 저는 1년만 하고 나가라는거였죠. 그 전에는 이런 얘기도 전혀 없었고, 어떤 평가냐고 물어봐도 말해줄 수 없다는 얘기만 했어요."

화연씨는 결국 신고 후 한달여 뒤 퇴사했다. 화연씨는 "신고 후 회사를 다닌 한 달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상사가 '합의금 받고 사내에서 조용히 넘어갈 일을 왜 밖에 알려 크게 만들었느냐' '너때문에 피곤해졌다'고 내내 화를 내더라고요. 평소 친하게 지냈던 직원들도 신고 후에는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돌'보듯 하고요. 사내 '왕따'였어요."

화연씨는 그중에서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억울했다고 했다.

"신고 후 '정규직을 요구했다더라' '돈을 달라고 했더다라'는 식의 소문이 났어요. 꽃뱀 취급을 당한거죠. 실제 직원 중 한 명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제가 1억원을 요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어요. 전 돈을 요구한 적도 없고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1심 '유죄' 나오자 '합의' 제의…'사내 홈페이지에 사과글 올려라' 요구했지만 거절당해"

신고 후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화연씨는 말했다. "말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진술서를 써줬던 목격자가 검찰에서는 "A씨가 만취해 화연씨가 부축을 해줬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면서 검찰은 A씨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결국 재정 신청 끝에야 겨우 재판을 열 수 있게 됐다. 검사가 증거가 부족해 재판에 못넘긴다고 한 것을 법원이 재판을 열도록 한 것이다. 신고 후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 

화연씨는 "A씨가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 만졌고, 허리를 감싸 안았고, 엉덩이를 쓰다듬듯 만졌다"고 주장했다. A씨 측은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긴 했지만 고의는 없었다 △어깨동무는 했지만 허리를 감싸안지는 않았다 △만취해 소파에 팔을 기대다 손을 떨어뜨려 손이 피해자의 엉덩이에 깔린 사실은 있지만 쓰다듬듯 만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A씨를 유죄로 인정,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사진을 볼 때 A씨가 만취했다고 보기 힘들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피해자(화연)가 주장한 일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강제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화연씨는 "1심 판결 이후 A씨 측에서 3000만원까지 합의금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합의하자'더라고요. 그래서 사내 홈페이지에 본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와 제가 정규직 전환이나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적어 올리면 합의하겠다고 했어요.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합의하지 않았죠."

◇1심 '유죄'→2심 '무죄'…"'부적절한 행동' 있었지만 '강제 추행'은 아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다'면서도 '기습추행'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점 △어깨에 손을 올린 점 △손을 피해자 엉덩이 아래 접촉한 점은 사실로 봤다. 하지만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 만졌다거나 허리를 감싸 안거나 엉덩이를 만졌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부적절한 행동'은 있었지만 '피해자가 주장한 것과 살짝 다르니 죄는 아니다'고 본 셈이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A씨는 '무죄'가 됐다.

화연씨 사건을 담당한 국선변호사는 "다수의 목격자 진술서, 문자 메시지 등 객관적인 증거가 많이 있었다"며 "1심에서 유죄가 나왔고 증거도 많은데 무죄가 나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화연씨는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뒤 A씨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2심의 '무죄' 선고에도 민사 2심 재판부는 A씨에게 '위자료 600만원'을 선고했다. 민사 재판부는 "직장내 성희롱이 있었던 것이 맞고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신고 후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너무 힘들었고, 퇴사 후에도 소송에 시달리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스트레스로 건강이 많이 상해서 6개월 쯤 쉬고 다른 회사에 들어갔는데, '조사 받으러 와라', '법정에 나와라' '합의하자' 등 계속 연락이 왔죠. 민사 소송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재판을 계속 끌더라고요. 왜 피해자인 제가 회사를 옮기고, 지금까지 힘들어야하는 거죠? 가해자는 지금도 같은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데요.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A씨는 "6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화연씨의 4년전 그 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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