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vs "교감"…서로 다른 '그날 밤'의 기억

[재판의 법칙-성폭력 무고죄] 법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성관계의 성격…성폭행·무고 둘다 '무죄' 나오기도

한정수 기자, 김종훈 기자 2018.04.24 05:00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었다. 밤 늦게 잠을 청하려는데 남자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받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불쑥 집으로 들어왔다.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술에 취했으니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성관계를 요구했다. 내키지 않아 싫다고 했다. 갑작스런 일이라 소리치거나 저항하기 어려웠다. 

#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 술을 많이 마셨다. 늦은 밤, 그녀의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만나주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면 안될 것 같았다.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싫다고 했다. 언성이 높아지지는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다툼이 이어졌다. 서로가 지쳐갈 때 쯤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그렇게 함께 밤을 보냈다.

한 30대 연인의 사연이다. 같은 날 밤의 이야기다. 그러나 기억은 서로 다르다. 남자친구 A씨는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여자친구 B씨가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면서다. A씨는 억울하다며 B씨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둘은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한 30대 여성이 가수 김흥국씨(59)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고 그를 고소했다. 이에 김씨는 해당 여성을 무고 등의 혐의로 맞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냈다. 

과연 법정에선 진실이 가려질까? 때론 법정도 진실을 온전히 가려내주진 못한다. 적어도 성폭력 무고 사건에서 그렇다. 

◇성폭행 '무혐의', 그런데 무고죄도 '무죄'?

복잡미묘한 성관계의 성격을 법으로 재단하긴 쉽지 않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양쪽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일인 만큼 증거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낮다. 두 사람이 나눈 메시지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찢어진 옷 등이 있다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건에서 증거는 양쪽의 진술 뿐이다. 

그러다보니 성폭력 무고 사건에선 시시비비가 말끔하게 가려지지 않기도 한다. 성범죄가 무죄라면 무고죄는 유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 성범죄가 무혐의인데, 무고죄도 무죄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법적으로 누구에게도 죄를 묻기 어렵다는 뜻이다. 

가수 박유천씨(32)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4명의 여성에게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박씨는 지난해 4건 모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성폭행이 없었다면 성폭행죄로 박씨를 고소한 여성은 무고죄로 처벌을 받는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박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가 무고죄로 재판에 넘겨진 한 여성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재판에선 가능한 일이다. 무고죄는 타인이 형사처분 등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신고할 때 성립한다. 상대를 처벌받게 하기 위해 거짓말로 고소장을 내야 무고죄라는 얘기다. 고소 내용이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이 아니고 사실에 기초해 그 정황을 다소 과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무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의 판례다. 법적인 의미의 성폭행이 없었더라도 상대방이 성폭행으로 생각했다면 무고죄가 아니라는 뜻이다.

현행 형법상 강간, 즉 성폭행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경우 성립한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면 아무리 원치 않은 성관계라도 법적으론 성폭행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행법상 강간죄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 같은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성폭행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성폭행의 법적 요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상대방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간 자칫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판사 "한쪽 손 들어주면 상대방 명예 실추"

판사들에게도 무고죄 판단은 어려운 숙제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성폭행이 있었다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며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는 등의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판단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이유로 더 엄격히 사건을 심리하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 종종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성폭행으로 고소를 한 피해 여성들에 대해 검찰이 너무 쉽게 무고 혐의를 적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검찰이 범죄 혐의가 있다는 생각에 기소를 할 때 확신하는 정도와 법원이 유죄 판결을 할 때 확신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원에서 판결을 할 땐 수사기관보다 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성폭력 무고죄가 '미투'(Me Too) 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여성 변호사는 "성범죄를 신고한 사람이 무고죄의 피의자가 될 위험 때문에 조사를 받을 때 움추려들 수 있다"며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무고죄 적용 전에 먼저 성범죄 사건을 잘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반면 일각에선 성폭력 무고죄의 처벌 수위를 높여 억울한 사례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무고죄의 법정형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한 변호사는 "근거없는 무분별한 폭로로 졸지에 성범죄자로 낙인이 찍히는 사례들도 있는데, 이 경우 정상적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진다"며 "수사기관에서 성폭력 무고죄를 신중하게 적용하되 그 처벌 수위를 높여 근거없는 폭로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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