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난 왜 백인들 학교에 못 가요?"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美 연방대법원 1년에 100건 미만 처리, 韓 대법원은 4만여건…대법관 2배로 늘린다고 해결될까?

이상배 기자 2018.07.12 05:00

1951년 미국 캔자스주. 여덟살 소녀 린다 브라운은 매일 21블럭이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다녔다. 집에서 불과 5블럭 떨어진 곳에도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소녀는 그곳에 배정받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소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보다못한 소녀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이 집에서 가까운 백인 학교에 딸의 전학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분노한 브라운은 결국 소송을 걸었다.

3년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소녀의 손을 들어줬다.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기존 판례를 58년만에 뒤집는 결정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판결으로 불리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이다. 이 판결 하나로 이후 미국의 모든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7년 뒤 태어나 백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한 흑인 어린이는 2009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리는 곳이다.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 판결 하나에 3억명이 넘는 미국인들의 삶이 달라진다. 게다가 돌이킬 수 없는 최종심이다. 사건 하나 하나를 심사숙고할 수 밖에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년에 100건 미만의 사건만 처리한다. 올라오는 사건은 매년 최대 1만건에 이르지만 대법관 중 4명 이상이 찬성해야만 상고심에 들어간다. 나머지는 모두 자동 기각된다. 이른바 '상고허가제'다. 대신 일단 사건을 다루기로 하면 9명의 대법관이 모두 매달린다. 전원합의체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결론을 도출한다. 판결에 권위가 실릴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2016년 대법원이 처리한 사건은 무려 4만3129건에 달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하고 대법관 12명이 한명당 1년에 3594건씩 처리한 셈이다. 4건에 3건 꼴로 '심리불속행 기각'을 하지만, 그래도 한명당 1년에 약 1000건은 실제로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을 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판결을 뒤집는 혁신적인 판결이 나오길 기대한다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대법원이 판결을 '풀빵' 찍어내듯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대법원 판결은 일선 법원 판결의 이정표다. 대법원 판례가 바뀌지 않으면 하급심 판결도 안 바뀐다. 판사가 용기있는 판결을 내봐야 고등법원이나 대법원에 가서 뒤집힌다. 업무평가를 잘 받으려면 대법원 판례대로 판결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법을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법을 해석하는 법원, 그것도 대법원의 판결이 바뀌어야 비로소 세상이 달라진다. 예순이 넘은 대법관들에게 매년 1000건에 가까운 사건을 던져주면서 새로운 판결을 내리라고 요구할 순 없다. 대법관을 늘리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여당이 대법관 증원을 골자로 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추진한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준비한 개정안에는 대법관을 현재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환영할 일이지만 그 정도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대법관이 2배로 늘고 1인당 사건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고 뭔가 바뀔까?

우리도 미국처럼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면 되지 않느냐고? 미국은 1심까지만 사실심이고, 2심부턴 법률심이다. 대법원까지 안 가도 큰 문제가 없다. 반면 우리나라는 2심까지 사실심이고 대법원만 법률심이다. 법률심을 한번도 못 받은 사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기각하면 누가 받아들이겠나?

독일은 대법원에 해당하는 최고법원이 5개의 전문법원으로 쪼개져 있다. 여기 속한 연방법관의 수는 300명이 넘는다. 물론 이들 모두가 우리와 같은 대법관급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곳에선 최고법원이 서류 더미에 짓눌려 허덕이며 찍어내듯 판결을 낼 일은 없다. 우리라고 이렇게 못할 이유가 있나? 생각을 크게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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