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건인지 몰랐다"는 변호사…두번 우는 성폭력 피해자

[그일, 그 후] 유명무실한 성폭력 피해자 국선변호사…"돈 안 받았으니 문제 없어"

박보희 기자 2018.08.13 15:51

임종철 디자이너

은미씨(23·가명)는 직장 상사 A씨(53)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이후 경찰에 신고하면서 성폭력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신청했다. 법원에서 지정된 국선변호사의 연락처를 받아 연락해봤지만 "국선변호사 지정결정서를 받지 못한 것을 보니 나는 당신의 변호사가 아닌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다시 법원에 연락해봤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별다른 설명은 듣지 못했다. 

그 사이, A씨는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성추행 신고 후 가해자에게 합의를 종용받고, 직장에서 해고되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고 있던 은미씨는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선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여유가 없던 은미씨는 더이상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은미씨가 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 항소심 재판이 진행됐고, 2심 법원도 A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 사건 검색을 통해 뒤늦게 은미씨는 1심과 2심 모두 처음 연락했던 변호사가 자신에게 지정된 피해자 국선변호사임을 알게됐다. 사건 기록에는 1·2심 법원이 그 변호사에게 재판 관련 소식을 전했고, 변호사는 이를 받았다고 나와있었지만 변호사는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은미씨의 국선변호사로 지정된지도 몰랐던 은미씨의 변호사는, 당연하게도, 단 한 번도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은미씨의 성추행 사건 재판은 손도 못 써보고 끝났다. 

은미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실제 피해자가 국선변호사를 신청했는데도 사건이 누락돼 피해자가 변호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사건이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각종 제도상의 헛점으로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지정된 줄도 모르고 알아도 나몰라라"

피해자 국선변호인 제도는 아동 사건이나 성폭력 사건의 경우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2차 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사건 초기부터 피해자들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됐다. 피해자는 상담 센터나 경찰에 신고할 때, 국선변호사를 신청하면 변호사를 지정받고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수사기관은 등록된 피해자 국선변호사 명단에서 변호사를 선정해, 변호사에게 '국선변호인 지정결정서'를 팩스로 보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결정서가 직원의 실수나 기계적 문제 등으로 변호사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은미씨 같은 경우다. 은미씨의 국선변호사는 "이런 식으로 사건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은데 수사기관 쪽에서 결정서를 받았는지 확인하지 않는다"며 "모르는 사건에 대한 공판기일 통지가 오면 '사건이 누락됐구나' 한다"고 말했다. 재판에 나오라는 통보를 받고서야 '내게 배정된, 내가 모르는 사건이 있구나' 안다는 얘기다. 

물론 피해자가 연락을 하거나 재판 출석 통보를 받았을 때, 변호사는 수사기관에 연락하거나 사건 검색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는 "국선 변호사를 지정하면서 수사기관이 팩스로만 지정서를 보내고 따로 연락하지 않아 지정 여부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도 "피해자가 연락을 하거나 재판 관련 통보가 오기때문에 아예 모르고 넘어가는 일은 드물다"고 말했다. 

문제는 변호사들의 역량과 상황에 따라 피해자 지원의 질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뒤늦게라도 지정 사실을 알고 피해자 지원을 시작하는 변호사도 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한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피고인 변호사는 재판 참석 등 의무가 있지만, 피해자 변호사는 다르다"며 "피해자 상담이나 의견서 작성, 재판 참석 등이 의무가 아니라서 어떤 변호사를 만났느냐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나마나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의 대리인은 검사다. 피해자는 사건 당사자지만, 수사기관에 사건이 넘어간 이후부터 당사자가 아닌 참고인이 되고, 재판에는 '증인'으로 참여한다. 더이상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이 '당사자'와 '참고인'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극단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은미씨의 경우처럼, 재판 진행에는 문제가 없다. 

◇"변호사 조력 따라 2차 피해 여부 갈리기도…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 바꿔야"

일부 변호사들이 피해자 국선 사건에 이같은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는데는 비현실적인 보수도 한몫한다. 피해자 국선 사건 보수는 변호사의 활동에 따라 정해진다. 법무부에 따르면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수사·공판절차 참여할 경우 10만~20만원을, 서면을 제출할 경우 최대 10만원을 받는다. 은미씨의 국선변호사는 "활동에 따라 보수를 받는데, 이 사건으로 전혀 보수를 받지 않았다"며 "법적, 도의적으로도 잘못은 없다"고 말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의무도 아닌 일을 안했다고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서초동의 한 성폭력 사건 전문 변호사는 "사건이 없으면 피해자 국선 사건이라도 아쉬워서 챙기지만, 다른 사건이 많으면 버리는 식"이라며 "차라리 사건을 포기하면 다른 국선변호사가 지정되는데, 지방의 경우 피해자 국선 사건을 맡겠다는 변호사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안하겠다고 하면 검찰 쪽에서 좋아하지 않으니, 검찰과의 관계를 생각해 그냥 두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피해는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특히 최근에는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무혐의 처분이나 무죄를 받고 나면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성폭력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증거 부족으로 재판에 넘기지도 못하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고 나면 피해자는 2차 피해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자칫 잘못 대처할 경우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자'에서 '무고 가해자'로 바뀔 가능성도 적지 않다. 피해자 변호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이은의 변호사는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법적 대응을 한다"며 "뚜렷한 물증이 남기 어렵고 피해자가 수사나 재판 과정의 정보를 얻기 어려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법률 대리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의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 같은 제도 안에서는 피해자가 어떤 변호사를 지정받는지에 따라 '복불복'식으로 운용될 가능성이 높은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피해자 지원을 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기계적으로 국선변호인을 지정해줄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일정 금액을 지원받아 직접 변호인을 선임하는 등 스스로 자신의 사건을 운용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방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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