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아닌 개표가 결정한다?'…전자개표기 둘러싼 '갑론을박'

[박보희의 소소한法 이야기]개표 조작 문제제기한 '더플랜'…닫힌 투표함 다시 열 수 있을까

박보희 기자 2017.04.28 18:27


'투표가 아니라 개표가 결정한다' 도발적인 문구로 이목을 끈 영화 '더 플랜'이 2만여명의 관객을 모았습니다. 개봉 전 유튜브를 통해 무료 공개한 영상은 이미 조회수 150만을 돌파했습니다.


영화 내용은 복잡하지만 단순합니다. 18대 대선 결과 조작이 의심된다는 건데요. 영화를 제작한 김어준씨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공식 문서 등을 분석하며 전자개표 시스템에 허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플랜'의 인기몰이에 선관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투표지를 직접 검증하는 것"이라며 "19대 대선 종료 후 더 플랜 제작팀의 요구가 있다면 공개 검증 하겠다"고 응수했습니다.

'더 플랜'에 담긴 내용의 진위는 결국 선관위 말대로 지난 대선 투표함을 하나하나 꺼내보지 않는 한 확인하기는 쉽지 않을텐데요. 전자개표기(투표지분류기) 조작에 대한 진위 여부는 살짝 미뤄두고, 대선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의심이 생겼을 때 문제제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선거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됐다면 당선은 무조건 무효가 되는 걸까요. 이미 당선자가 결정된 선거의 투표함은 다시 열어볼 수 있을까요.

◇'선거 절차에 문제가 있다'…'선거소송' 제기 가능

선거 결과를 둘러싼 소송은 크게 '선거소송'과 '당선소송'으로 나뉩니다. '선거소송'은 '선거의 효력'에 관해 이의가 있을 때, '당선소송'은 '당선의 효력'에 이의가 있을 때 제기할 수 있습니다. 즉, 후보자가 아닌 선거 절차 등 선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선거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222조는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의 효력에 이의가 있는 선거인·정당 또는 후보자는 선거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대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정해두고 있습니다. 선거개표기에 문제가 있다는 의심이 들 때는 '선거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거죠.

법에는 선거인, 정당, 후보자가 소송을 낼 수 있다고 명시돼있지만 사실상 전 국민 누구나 소송을 낼 수 있습니다. 행정소송법 제3조의 '민중소송'에 해당하기 때문인데요. 민중소송은 국가나 기관이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을 때 직접 자기의 법률상 이익과 관계가 없더라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제기하는 소송을 말합니다. 선거소송은 민중 소송의 대표격인 셈입니다.

◇규정 어겼어도 '당선에 영향 줄 정도' 아니면 '무효'아니야

우리나라 선거 제도는 3심제를 기본으로 합니다. 혹시나 모를 잘못된 판결을 막기 위해 한 사건을 두고 세 번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시·도지사 선거소송은 단심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한 번 재판을 하고 결과를 확정한다는 뜻인데요.


대법원이 바로 사건을 접수해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소송 결과가 바뀌거나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 혼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공직선거법 제225조는 선거에 관한 소청이나 소송은 다른 쟁송보다 먼저 신속히 결정 또는 재판해야 하며, 소가 제기된 날 부터 180일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정해두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일종의 권고 규정으로 꼭 180일 이내에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대법원의 설명입니다.

선거 과정에서 문제가 밝혀졌다고 해도 무조건 당선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직선거법 제224조는 선거에 관한 규정 위반 사실이 있더라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할 때에 한해 선거의 전부나 일부, 또는 당선의 무효를 판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더라도 당선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면 당선 무효를 선고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자개표기' 논란

사실 전자개표기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전자개표기에 문제가 있다며 선거소송을 제기했다가 소송을 취하한 바 있습니다. 이후에도 전자개표기를 둘러싼 소송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선 뿐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등 전자개표기를 이용한 선거마다 '전자개표기 사용은 불법'이라는 소송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선관위에 따르면 그동안 전자개표와 관련해 헌법소원 5건, 선거소송 26건 등이 제기됐고 대부분 기각이나 각하됐습니다. '기각'은 소송을 낼 형식은 갖췄지만 내용을 살펴보니 심사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각하'는 소송을 낼 요건조차 갖추지 못해 판단을 할 필요 없이 사건을 마무리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거만 끝나고 나면 비슷한 소송이 이어지자 대법원은 '전자개표기 사용은 불법'이라며 제기된 소송에 '소권남용'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전자개표기를 사용한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무효'라며 선관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대법원은 이미 전자개표기 사용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고 이같은 사건은 선관위 업무를 방해하고 사법 인력을 불필요하게 소모시키는 결과만 초래한다"며 각하한 거죠.

대법원은 지난 2004년에도 "전자개표기는 투표지를 분류 계산하는 기계 장치에 불과하고 분류된 투표지는 육안으로 심사하는 과정을 거친다"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지난해 3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전자개표기는 단순히 표를 분류하는 기계에 불과하고 득표수를 수작업으로 검토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선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178조제2항은 개표사무를 보조하기 위해 기계장치 또는 전산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원 역시 선거에서 전자개표기를 사용해도 된다고 일관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진=대법원

◇선관위 "재검표 가능"…대법원 "대통령 파면됐으니 선거무효소송 각하"

문제는 '전자개표기에 해킹이나 조작이 있었다면'으로 돌아갑니다. 기계 사용은 문제가 없지만, 기계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앞서 말한대로 직접 투표함을 열어보고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대법원이 투표함을 열어 재검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2년 당시 한나라당이 전자개표기에 문제가 있다며 선거소송을 제기하자, 대법원은 30여일 뒤 전체 244개 개표소 중 80개 개표소의 투표지 총 1104만9311매를 수작업으로 재검토했는데요. 재검토 결과 920표에서 개표 오류가 나타났습니다. 오류율 0.008%로 결과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고, 결국 한나라당은 소를 취하했습니다.

선관위는 이번에도 문제제기가 있다면 투표함을 열어 확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선관위 관계자는 "문제제기가 있다면 소송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선관위 결정에 따라 문제제기를 한 측이 합의한 공신력 있는 기관에 맡겨 재검표를 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전자개표 조작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대법원은 지난 27일 18대 선거무효소송에 대해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지난 대선 직후인 2013년 1월, 시민 6600여명이 '전자개표기 사용과 국가정보원 등 정부기관이 개입해 선거가 무효'라며 제기한 소송에 4년4개월만에 내린 결정인데요.

대법원은 각종 의혹에 대한 다른 설명 없이 "대통령이 파면돼 소송의 이익이 없다"고 봤습니다. 4년4개월만에 '대통령 파면'을 이유로 각하 결정을 한 것인데요. 만약 대통령이 파면되지 않았다면 대법원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난 뒤에야 판단을 내렸을까요. 지난 2002년 한 달만에 재검표를 실시해 의혹을 해소시킨 것과 비교하면, 또 대선 결과를 두고 수년간 제기된 각종 의혹과 현재 불거지고 있는 논란을 생각하면 대법원의 결정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19대 대선이 십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도 전자개표기를 사용하겠죠. 하지만 여전히 전자개표기를 둘러싼 논란은 분분합니다. 이같은 논란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으면 이번 대선이 끝나고 나서도 같은 소송은 반복될 겁니다. 대법원이 말한대로 이처럼 계속되는 소송은 사법 낭비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대법원 결정을 보고 의혹이 해소됐다고 시원해 할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의혹을 해소시켜줬어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의혹을 가중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더 플랜' 내용의 진위를 떠나 이를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아닐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 결과조차 믿을 수 없다는 건 결국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닐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선거를 만들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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